詩와 글

이 성복- 느낌, 그 여름의 끝, 길1,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비.

opal* 2008. 7. 25. 21:37

 

느낌

 

                            이 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그 여름의 끝

                                     이 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길1

 

                                 이 성복

 

그대 내 앞에 가고
나는 그대 뒤에 서고

그대와 나의 길은
통곡이었네

통곡이 너무 크면 입을 막고
그래도 너무 크면 귀를 막고

눈물이 우리 길을 지워버렸네
눈물이 우리 길을 삼켜버렸네

못다 간 우리 길은
멎어버린 통곡이었네.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이 성복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이 성복

 

가라고 가라고 소리쳐 보냈더니

꺼이꺼이 울며 가더니

한밤중 당신은 창가에 와서 웁니다

 

창가 후박나무 잎새를 치고

포석을 치고

담벼락을 치고 울더니

 

창을 열면 창턱을 뛰어넘어

온 몸을 적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