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446

'241217(화) 대화 / 유희경

대화 유희경네가 두고 간 커피잔을 씻는다그런데도아직 네가 여기 있네책장에 기대서서책을 꺼내 읽고 있네그 책은 안 되는데안 되는 이유가 뭘까손이 다 젖도록 나는생각해 본다그 책은 옛일에서 왔고누가 두고 간 것일 수도 있다얼마나 옛일일까두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그렇다 해서네가 읽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일까나는 젖은 커피잔을 엎어두고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엎어둔 건 커피잔이 아니었고곤란하게도젖은 내 손이었다커피잔 대신 손을 엎어두었다고곤란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젖은 내 손은 옛일과 무관하고네가 꺼내 읽을 것도 아니다성립하지 않는 변명처럼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네가 여기 있는 기분너는 책에 푹 빠져 있고손은 금방 마를 것이며네가 두고 간 커피잔은어디 있을까 나는체..

詩와 글 2024.12.17

'241129(금) 박남규 /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그리움이 밀려 옵니다. 박남규 검정 이불 껍데기는 광목이었다.무명 솜이 따뜻하게 속을 채우고 있었지.온 식구가 그 이불 하나로 덮었으니방바닥만큼 넓었다.차가워지는 겨울이면이불은 방바닥 온기를 지키느라낮에도 바닥을 품고 있었다.아랫목은 뚜껑 덮인 밥그릇이온기를 안고 숨어 있었다.오포 소리가 날즈음, 밥알 거죽에 거뭇한 줄이 있는 보리밥,그 뚜껑을 열면 반갑다는 듯주루르 눈물을 흘렸다.호호 불며 일하던 손이방바닥을 쓰다듬으며 들어왔고저녁이면 시린 일곱 식구의 발이 모여사랑을 키웠다.부지런히 모아 키운 사랑이지금도 가끔씩 이슬로 맺힌다.차가웁던 날에도 시냇물 소리를 내며콩나물은 자랐고,검은 보자기 밑에서 고개 숙인콩나물의 겸손과 배려를 배웠다.벌겋게 익은 자리는 아버지의 ..

詩와 글 2024.11.30

'241011(금) 청포도, 불참

'241011(금) 노벨 문학상 청포도 모임날(대공원)인데 해야 할 일이 있어 불참했다. 지난 달(백일제)에 이어 두 번째. 우리나라 작가가 을 받았다. 한국 문화의 글로벌 시대가 오래 지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십 여년 전, 전남 장흥에 다녀오며 도로 변에 아래로 내려 쓰인 간판 "해산토굴"을 본 일이 있다. 2016년 ‘채식주의자’로 ‘맨 부커상’을 수상하고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 이다. 이렇듯 한강(1970.11.27, 광주) 작가는 작가 가족 이다.아래 내용은 다른 기사 내용을 옮긴다.스웨덴 한림원은 10일 저녁 8시(한국시각)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작가 한강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상처에 직면하고 인간 삶..

詩와 글 2024.10.11

윤동주 / 자화상, 코스모스

자화상(自畵像)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온가 외딴 우물을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쳐지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는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코스모스                               윤동주 (1938~45) 청초..

詩와 글 2024.09.27

'240905(목) 어느 날 문득

휴대폰으로 전송되어 온 영상   어느 날 문득 누구나 살면서 어느 날 문득가슴 한쪽이 베인 것 같은통증을 느낄만치 낯선 그리움 한 조각간직하고 있지 않는 사람 어디 있을까?단지한편의 예쁜 시와감미로운 음악으로허기진 마음 채우고 있을 뿐이지... 누구나 살면서 어느 날 문득그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참고 또 참았던 뜨거운 눈물펑펑 쏟아내고 싶을 만치보고 싶은 한 사람 없는 이 어디 있을까?단지잊은 척 속 마음 감추고애써 웃고 있을 뿐이지...누구나 살면서 어느 날 문득생각만으로도 목이 메어숨이 턱하고 멎어 버릴 만치오랜 세월 눈물로 씻어도 씻기지 않는슬픔 한 조각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단지세월이라는 이름으로 덧입혀져슬픔조차도 희미해져 있을 뿐이지...누구나 살면서 어느 순간에목에 걸린 가시처럼뱉을 수도 삼킬..

詩와 글 2024.09.05

캐서린 맨스필드/ 정반대

'240717(수) 서울지역 폭우아침부터 퍼붓던 폭우는 낮에 잠깐 소강상태, 오후 되니 다시 줄기차게 쏟아진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    제발 비 피해가 없기를...  마음만 답답한 하루 하루가 속절없이 지나간다.  정반대                                    캐서린 맨스필드  아, 왈가닥 우리 딸,미소짓는 너의 행복한 얼굴은여름날의 향기로운 장미꽃처럼가장 따분한 곳마저 향기롭게 만드는구나.아, 요조숙녀 우리 딸,사랑스런 우리 아기, 엄마는 흡족해,우리 딸, 엄마가 안고 있어서.네가 장식이 아니라서.  『미소 짓는 너의 얼굴은여름날 장미꽃처럼가장 따분한 곳까지향기롭게 해』『O Half-Soled-Boots-With-Toecaps-ChildYour happy laughing f..

詩와 글 2024.07.17

정현종 / 방문객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 시선집《섬》 (정현종 지음, 열림원 발간) 중에서

詩와 글 2024.02.20

立春大吉 建陽多慶

'240204(일)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의 노래 정연복 겨울의 끝이 저만치 보이네 가슴 시린 오랜 추운 날들을 지금껏 잘 견디어 온 그대. 헤쳐가야 할 아픔과 시련의 시간 아직 그대의 발 앞에 놓여 있어도 이제는 눈물 거두고 웃으며 걸어가도 좋으리 꽃 피는 봄이 눈앞에 있으니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기쁘게 살아가리라 힘차게 노래해도 좋으리 봄을 위하여 천상병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여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입춘단장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 쪽에 나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난 지금 입덧 중-입..

詩와 글 2024.02.04

양광모/ 12월의 기도

12월의 기도 양광모 12월에는 높은 산에 올라 자그마한 집들을 내려다 보듯 세상의 일들을 욕심 없이 바라보게 하소서 12월에는 맑은 호숫가에 앉아 물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듯 지나온 한 해의 얼굴을 잔잔히 바라보게 하소서 12월에는 넓은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 너머로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듯 사랑과 그리움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게 하소서 12월에는 우주 저 멀리서 지구라는 푸른 별을 바라보듯 내 영혼을 고요히 침묵 속에서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고 또 바라보게 하소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듯 내가 애써 살아온 날들을 뜨겁게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불꽃처럼 살아가야 할 수 많은 날들을 눈부시게 눈부시게 바라보게 하소서. 12월의 기도 양광모 이미 지나간 일에 연연해하지 않게 하소서 누군..

詩와 글 2023.12.31

이원 / 사랑의 노래

'231229(금) 이것은 사랑의 노래 이원 언덕을 따라 걸었어요 언덕은 없는데 언덕을 걸었어요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양말은 주머니에 넣고 왔어요 발목에 곱게 접어줄 거에요 흰 새여 울지 말아요 바람이에요 처음 보는 청색이에요 뒤덮었어요 언덕은 아직 그곳에 있어요 가느다랗게 소리를 내요 실금이 돼요 한 번 들어간 빛은 되돌아 나오지 않아요 노래 불러요 음이 생겨요 오른손을 잡히면 왼손을 다른 이에게 내밀어요 행렬이 돼요 목소리 없이 노래 불러요 허공으로 입술을 만들어요 언덕을 올라요 언덕은 없어요 주머니에 손을 넣어요 새의 발이 가득해요 발꿈치를 들어요 첫눈이 내려올 자리를 만들어요 흰 천을 열어 주세요 뿔이 많이 자랐어요 무등을 태울 수 있어요 무거워진 심장을 데리고 와요 문학들 2016년 봄호

詩와 글 202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