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유 안진-부끄러운 연서

opal* 2009. 10. 2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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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연서戀書

 

                                                 유 안진


잊었던 사람에게..

손발이 시린날은 일기를 씁니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씁니다
부치지 못할 긴 사연을..

이 작은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엔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잊었던 사람이여..

이 한구절이 문득 떠오르면서 잇달아 그대 또한
내 영혼의 냇물을 서서히 거슬러 올라와
조용히 흔들리며 떠오르는 그리웁고 쓸쓸한
달빛으로 찾아옴은 또 어쩜인가요?

나는 분명 그대를 잊었습니다.
오래전 오래전에 이미 그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명령하고 강요한
나의 자존심이며 복수의 행위였습니다.

봄 바람에 어지러이 피어나는 꽃과
잎을 볼 적마다 증오의 불길을 부채 질 했었습니다.

불타는 여름 대낮 뙤약볕을 이고 걸으면서
보복하리라고 다짐하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해마다 나는
가을 찬바람을 받고 영롱하고 투명한 가을
하늘 아래 서면 번번히 그대를 용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주구천동 아흔 아홉 구비를 오르내리며
지난 밤 내 혼은 이미 긴긴 사연을 쓰고
다시 써놓았음을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계곡을 돌아치는 청아한 물결 소리에
이름 모를 비구니의 독경소리에
이끌려 잠못 청하던 내 혼이 떠돌며
방황했던 길목마다 산모퉁이마다
붉은 낙엽은 쌓여 있었습니다.

맨발로 걸어다닌 징검다리 위에도
단풍잎은 피묻은 발자국처럼 떨어져 있었고
다리 아래 물결에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머뭇대는 부끄러운 연서가 맴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나의 진실이었습니다.

다시금 그리워 오는 이여..!
이 가을 나는 가랑잎 한 잎에서
그대를 만나보며 거듭 용서합니다.

미움이나 사랑이나 연민마저도
억지로는 아니되는 것임을 내 혼이
그 피로 써 놓은 낙엽편지를 보고나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무릎이 시린 내 영혼의 방랑 끝에
다시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을 천 잎 만 잎

가랑잎에 새기면서 그대 지금 지구 끝
어느 모서리에 날 잊은 채로 살고있다 할지라도,
이 가을에 만나지는 내 영혼의 해후를 스쳐지는
낙엽으로 짚어 헤이리라 믿어봅니다.

시고 떫은 갈무리되지 못한 내 피를
곰삭여주는 눈부신 가을 볕과,
서럽고 안타까운 푸르른 달빛에 몸서리치는
감성과 이성의 곤두박질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거듭하고 나서 빛 붉은 낙엽으로 몸을 눕히는
사랑의 재단, 가을 언덕에 서면 소리쳐 불러보고 싶은
이름이 있다는 슬픔도 감사하게 받들여집니다.

지나온 날의 미움이 오히려 미안스러워지고
다짐했던 복수도 후회스럽다 여겨집니다.
다만 오직 한가지는 못내 그리울 뿐이라는 것.

신이여..!!
당신을 두고 했던 맹세했던 나의 복수를 지워주옵소서.
나는 용서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거쳐 새삼 증오하고
다시 용서하는 변덕스러움을 허물치 말으소서.

지우고 싶은 이름이여.
나는 그대를 용서합니다.
서리 내린 가을 언덕에 혼자 서면
새삼 굽어보는 빛 붉은 낙엽의 천지.
내 진실이 그대에게 써놓은 부치치 못한
긴 사연들.
불자(佛者)의 미소같이 쓸쓸히 웃으며
나는 잊기로 하고 그리하여 용서했습니다.

가을 바람 한자락을 빈 가슴에
담아 놓고 나는 돌아섭니다.
이제부터는 가슴마다 긴 밤이 열릴 것입니다.
나는 다시 임자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이 시린 가슴을 채우고 덥힐 한 귀절의 시를 찾아
나의 길을 떠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