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의 연가
이해인
이렇게 바람 많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서 불타는
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지난 이른 봄, 짙은 보라빛을 띄우며 바위틈에서 예쁘게 피었던 제비꽃,
몹씨 오래도록 가물고 노르스름한 송화가루 날릴 때, 꽃이 다 지고 잎만 남아 말라가기에
마시려고 준비한 물을 오르내리며 한 모금씩 부어주었더니 뿌리가 채 빨아먹기도 전
바위틈으로 흘러내려 걱정했더니... 장마철이 지난 지금은 아주 싱싱하게 잘 자라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내년 봄엔 더 많은 꽃송이 달고 예쁘게 예쁘게 피어 주렴...'
산에 다니며 풀 한포기와도 얘기 나누는 시간은 참으로 행복한 시간.
능소화
오세영
배신의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이다지도 아름답더냐.
체념의 슬픔보다 고통의 쾌락을 선택한
꽃뱀이여,
네게 있어 관능은
사랑의 덫이다.
네 부드러운 몸둥이
다리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가슴으로,
칭칭 감아 올라
마침내
낼룽거리는 혀로
내 입술을 감쌀 때
아아, 숨막히는 죽음의 희열이여,
배신이란 왜 이다지도
징그럽게 아름답더냐.
능소화 전설
옛날 복숭아 빛 빰의 자태가 고운 "소화" 라는 예쁜 궁녀가 있었다.
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성은을 입어 궁궐 내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임금은 그 이후로는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다가 돌아가지 않을까 또는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하여 담장 너머를 쳐다보며 안타까이 기다림의 세월이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다림에 지친 이 여인은 상사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뜨게 되었다.
그 후 이 여인의 처소 담장에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거나
발자국 소리를 듣기위해 꽃 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으니 그 꽃이 '능소화' 다.
능소화는 덩굴성으로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이 휘어 감으며 담장 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그 꽃의 모습은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하고, 꽃가루에는 독소가 있어 실명 위험이 있다고도 한다.
백일홍
문성해
어젯밤
어디서 잤는지
머리에
붉은 실밥이 가득하다
수박장사 리어카조차
그늘에서 쉬고 있는
한낮
지린내가 진동하는
공터에
태양을 독점한 듯
미친 여자 하나
눈부시게
서 있다
문성해,『자라』(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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