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이 기철-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구름에서 내려오다, 숲은 별

opal* 2008. 6. 27. 23:20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이 기철 
 
사랑하는 시간만 생이 아니다
고뇌하고 분노하는 시간도 끓는 생이다
기다림만이 제 몫인 집들은 서 있고
뜨락에는 주인의 마음만한 꽃들이
뾰루지처럼 붉게 핀다
날아간 새들아, 어서 돌아오너라
이 세상 먼저 살고 간 사람들의 안부는 이따 묻기로 하고
오늘 아침 쌀 씻는 사람의 안부부터 물어야지
햇빛이 우리의 마음을 배추잎처럼 비출 때
사람들은 푸른 벌레처럼 지붕 아래서 잠깬다
아무리 작게 산 사람의 일생이라도
한 줄로 요약되는 삶은 없다
그걸 아는 물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반딧불 만한 꿈들이 문패 아래서 잠드는
내일이면 이 세상에 주소가 없을 사람들
너무 큰 희망은 슬픔이 된다
못 만난 내일이 등 뒤에서 또 어깨를 툭 친다
생은 결코 수사가 아니다
고통도 번뇌도 힘껏 껴안는 것이 생이다
나무들은 때로 불꽃 입술로 말한다
생은 피우는 만큼 붉게 핀다고

 

 

구름에서 내려오다

                                            이 기 철

고견사(古見寺) 운상선원(雲上禪院)은 꽃으로 덮여 있다
들과 산을 제 색깔과 향기로 채우는 일을
풀과 꽃 아니면 누가 할 것인가

사람 대신 꽃 이름 불러보고 싶어
예고 없이 산에 드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이 누구인가
달력의 5월은 아직 산중까지 오지 않아
물 소리가 골짜기를 여는 데 아침 나절이 걸린다

철쭉 지고 나니 설상화가 잎을 내밀어
덩달아 피는 꽃이 산을 무등 태운다
굴참나무 곁에서 바라보면 산이 꽃 향기에 실려
구름보다 가볍게 산 아래로 떠내려 가는 것이 보인다
꿩비름 노루발톱풀, 숨겨놓은 햇살이 솔그늘을 재운다

누가 이름하였는가,운상선원(雲上禪院)엔 비가 오지 않을텐데
갑자기 몰려온 구름 송이가 후두둑 빗방울 뿌려
내 신명을 깨뜨린다
꽃은 지상(山上)에 피고 나는 하산(下山)해야 한다
때 절인 창자와 뇌수를 씻지 않고는 아무도
이 고산(高山)에 들 수 없다

나무 이름 꽃 이름 함부로 부르는 것도 내 거짓된 욕망이라고
바위를 스치는 바람 한 폭이 찢을 듯
내 옷소매를 당긴다

내려가라 내려가라 운상선원(雲上禪院)엔 오르기도 이렇게 힘겨운데
욕망을 숨긴 운동화 발로 어지 선계(仙界)를 지나
하늘로 오를 것인가

 

 

숲은 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기철

숲이 없었으면 연기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집들이
더 쓸쓸했을 것이다
아직은 별의 기억이 있어 알맞게 흔들리는 나무와 숲들
마을의 수저 소리가 들리는 동안
숲은 새들을 불러들이고
풀들의 저녁식사 소리를 들으며
나무들은 잠을 청한다
한 번 뿌리 내린 곳이 일생이 되는 나무들
한번도 밖을 나가본 일 없어도 나무들은 외롭지 않다
작년의 씨앗을 떠나보내고 올해의 씨앗을 맺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조심스런 생을 운반해 왔는가
맑은 날 열매들이 햇빛의 쌀밥으로 식사하는 소리
바람이 골 가득 잠긴 산문을 여는 소리
푸름이 길을 끌고 산으로 올라가는 소리
나무들이 스스로 일으키며 즐거워하는 소리
봄 아니면 누가 숲의 옷을 갈아입히랴
비에 머리 감고 눈으로 이불 덮었던 숲을,
냇물이 하늘로 띄우는 기별을 듣고
잎새들은 일제히 음악이 된다
한꺼번에 초록이 되었다가 한꺼번에 주황이 되는
나무들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숲이 꿈꾸는 먼 별의 기억을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이 기철

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일찍 저무는 날일수록 산그늘에 마음 베인다
손 헤도 별은 내려오지 않고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무들만 내 곁에 서 있다

가꾼 삶이 진흙이 되기에는
저녁놀이 너무 아름답다
매만져 고통이 반짝이는 날은
손수건만한 꿈을 헹구어 햇빛에 널고
덕석 편 자리만큼 희망도 펴놓는다

바람 부는 날은 내 하루도 숨가빠
꿈 혼자 나부끼는 이 쓸쓸함
풀뿌리가 다칠까 봐 흙도 골라 딛는
이 고요함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 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가도 닿지 못한 햇볕 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임을 깨닫는 저녁
산그늘에 고요히 마음 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