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권 경업- 바래봉 철쭉, 국망봉, 바람꽃, 갈전곡봉 칡꽃, 고치령에서,구왕봉

opal* 2008. 5. 23. 01:33

 

 

 

바래봉 철쭉
 
                          권 경업 
  
  그대 바라볼 수 있음은
소리치지 못하는 환희입니다

화냥기라구요?
아니에요, 그저 바라만보다 시드는
바래봉 노을입니다

아니 노을 같은 눈물입니다
눈물 같은 고백입니다

 

 

국망봉(國望峰)
 
                                권 경업
  
  소백산엔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국망봉 오르는 샘터가에
고운 자운영
당신이 그리움에 목매여
피를 뚝뚝 흘렸다 합니다

머-언 오래전 부터
돌아 갈 고향 없는
당신 곁에 앉아
귀촉도도 밤새워 울었다지요

수많은 봄들이
울음으로 그렇게 스쳐가고
이 봄마저
자운영 같은 설움만 남았어도
 
아직 시린 바람 맞으며
국망봉에 앉아
우리 어머니 가슴처럼
그래도 기다리렵니다
 
                                                                                                  *국망봉- 소백산의 한 봉우리.

신라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멀리 경주를 바라보며 울었다는 이름이 유래.

 

바람꽃  
 
                권 경업
  
  보이지 않니
쑥밭재 넘는 바람꽃

바람만 바람만, 너에게로
하양게 풍화한 억새와 그리움
정말 보이지 않니

                                                                                          *바람꽃: 바람이 일 조짐으로

먼 산에 구름같이 끼는 기운 
 *바람만 바람만: 바라 보일만 한 정도로

뒤에 떨어져 따라 가는 모양

갈전곡봉(葛田谷峰) 칡꽃
 
                                          권 경업 
 

갈전곡봉 칡넝쿨
밀치고 당기고 휘감고
할퀴고 쪼으면서도
어제같은 오늘 살아가는데
뇌성벽력 장대비 퍼부을 때는
오히려 그 삶이 힘이 되어서
흰머리메 큰줄기
거친 너덜에
질기고 모질게 아래로만 긴다
비 개이는 아침 내일을 위해
한뿌리의 의지 악착같이
줄기줄기 홍자색
꽃을 피우는구나
사람들아
아랫동네 갈전리
황시댁 텃밭에서
햇감자
하얀 속살로 살쪄가고
북녘 북청땅 희사봉 아래
측산포 비탈에도
옥수수알 희망처럼
노랗게 여물어 가는데
좌절과 절망은 오히려 희망이 되어
내일로 가는 오늘
칡밭골봉 칡꽃같은 꽃을 피우소

 

 

고치령에서
 
                        권 경업 
  
  털갈이 궁노루가
영을 넘을 때
숯막골 깊숙히
안개가 피고

엄두릅 돋은 순을
따던 소녀는

촉촉히 젖은 눈을
곱게 떠서는

떠나가는 먼 하늘
구름을 본다.

                                                                *고치령- 경북 영풍군에 있는 고개.

 

 

구왕봉
  
                      권 경업 
  
  봉암사 명부전에 계시지 않고
오늘 하늘에 눈내려
이 강토에 생당목 덮어놓은듯 하오니
혹시라도 이 땅 심판하시려고 모이셨는지요
부디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르고 나쁘고 못된 놈들
잘되게 해주십사 비나이다
진광대왕 초강대왕
송제대왕 오관대왕
염라대왕 변성대왕
태산대왕 평등대왕
도시대왕 다 오셨는데
어찌 전륜대왕만 안오셨나이까
혹시 눈내린 뒤 날 개이니
희양산 바위 양지녘에 졸고나 계시지 않으신지요
제발 오시려거든 빨리 오시어
이 약한 백성들 보살피옵사 비옵니다 

 

 *구왕봉: 희양산 서편으로 있는 봉우리. 해발표고 898m.

 

 

닭목재
 
                      권 경업 
  
  백두대간 닭목재에
새벽닭
홰치는 소리 들리지 않음은
이땅에
아침이 밝으라고 울다
목이 잠긴 때문이겠지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때문이겠지

우리 어메
烏水鏡 알 두터워져 간 세월
지금이라도
산넘어 대관령으로 오신다면
토하는 피 삼켜가며
목놓아 울리라 

*닭목재- 강릉과 정선 사이 백두대간의 고개.
*오수경- 烏水晶의 알을 끼운 안경.

 

당신은 누구십니까
 
                                 권 경업 
  
  누구십니까
혹여 키 낮은 풀꽃 아닐런지요
겨우내 아린 꽃물 품어
보아줄 이 있건 없건
조그만 꽃부리 애써 여는 당신은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소리 낮추어 피는 감자난초 족두리풀
듣기에도 어색한 개불알꽃 고슴도치풀
이름 한 번 불릴 일 쉽지 않은 이 땅에
말 없는 노랑제비꽃
연보라 노루귀, 꿩의바람꽃
천덕꾸러기 엉겅퀴 들꽃이라도
세상의 아름다움 위해서입니다
 
무심히 스치는 길섶, 하찮다지만
먼지만한 씨앗으로 세상에 오던 날
하늘에는 바람, 땅에는 비 내렸습니다
척박한 땅 싹 틔워 질긴 뿌리 내리라는
그 가르침

당신은 누구십니까

 

 

등산
 
                              권 경업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리메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