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김 재진 - 12월, 가슴 아픈 것은 다 소리를 낸다, 행복

opal* 2008. 12. 1. 09:03


 

12월

 

                                             김 재진

 

달력 속의 숫자에 우표를 붙인다.
이혼한 여자처럼 불 꺼진 그믐에
혼자 앉아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쓴다.
십이 월, 십이 월……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그대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는 일에 나는
길들어져 있다.
단념하듯 날 저물고
눈 내린다.
일제히 하얀 점으로 변하는
눈동자 속의 십이 월,
길 위로 나서기 위해
목이 긴 구두를 꺼내 신는다.
여름의 끝에 헤어진 친구를
눈발 속에서 찾다.
그대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는 일에
정말 나는 길들여 있을까.
사막에 눈 내리면
검은 머리카락이 반쯤 젖는다.
타클라마칸이나 라자스탄 쯤의 십이 월,
때로는
지쳐서 주저앉아 있는,
내 청춘의 사막쯤에 숨겨놓은 십이 월,
가끔은
그대 침묵 앞에
온몸을 사르는 숯으로 빛나고 싶을 때가 있다

 

 

가슴 아픈 것은 다 소리를 낸다

 

                                                          김 재진

 

 별에서 소리가 난다.
산 냄새 나는 숲 속에서 또는
마음 젖는 물가에서 까만 밤을 맞이할 때
하늘에 별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
자작나무의 하얀 키가 하늘 향해 자라는 밤
가슴 아픈 것들은 다
소리를 낸다.
겨울은 더 깊어 호수가 얼고
한숨짓는 소리,
가만히 누군가 달래는 소리,
쩌엉쩡 호수가 갈라지는 소리,
바람소리,
견디기 힘든 마음 세워 밤 하늘 보면
쨍그랑 소리 내며 세월이 간다.

 

 

행복

 

                                        김 재진

 

그 자리에 그냥 서 있는 나무처럼
사람들 속에 섞여 고요할 때
나는 행복하다

아직은 튼튼한 두 다리로 개울을 건너거나
대지의 맨살을 발바닥으로 느낄 때
만지고 싶은 것
입에 넣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하나 없이 비어 있을 때
행복하다

가령 봄날의 따스한 햇살이 어깨에 닿고
한 마리 벌이 꽃 위에 앉아 있는
그 짧은 세상을 눈여겨 보라

멀리 산 그림자 조금씩 커지고
막 눈을 뜬 앵두꽃 이파리 하나 하나가
눈물겹도록 아롱거려 올 때
붙잡는 마음 툭, 밀어 놓고 떠날 수 있는
그 순간이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