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 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 일러스트=권신아
시간과 계절은 너무 빨리 달아나고, 우리는 너무 빨리 늙고, 늘 배고픔과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면서
이 시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이 반복되는
불온하다는 말, 문제적이라는 말이 장 정일처럼 잘 어울리는 시인이 또 있을까.
입력 : 2008.03.17 22:32
'詩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 탁번 - 폭설, 벙어리 장갑, 학번에 대하여, 굴비. (0) | 2009.01.21 |
|---|---|
| [애송시 100편 - 제 60편] 박 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 (0) | 2009.01.18 |
| 김 기택 -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멸치, 고요하다는 것. (0) | 2009.01.07 |
| [애송시 100편 - 제58편] 장 석남 - 수묵(水墨) 정원 9 - 번짐 (0) | 2009.01.05 |
| 김 동월 -광명의 아침, 내가 행복한 이유, 섬, 만남과 이별 사이에는. (0) | 2009.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