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김 기택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고층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 외로운 추수꾼: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The Solitary Reaper>에서 인용
멸치
김 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고요하다는 것
김 기택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차 있다는 것 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소리 속에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 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 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 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 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을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적도 않을 것입니다.
김 기택
1957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95년 제1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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