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설
(낭송 이인철)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暴雪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ㅡ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 잉!
눈이 좆나게 내려 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ㅡ워메, 지랄 나부렀소 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 싸게 나오쇼 잉!
왼 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 하게 보일 뿐
온 天地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宇宙의 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ㅡ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 돼 버렸쇼 잉!
벙어리 장갑
오 탁번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
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
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
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
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
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
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
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
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
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
--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
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
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
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
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
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
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
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
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시집 '벙어리 장갑' (문학사상사.2002.10)
학번(學番)에 관하여
오 탁번
갓 제대하고 복한한 어느 학생이
학교 앞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건방지게 떠드는
옆자리 학생에게 말했다
"야! 너, 며탁번이야? 위 아래도 업서?"
쓴 소수에 빨갛게 취한 학생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흥, 나보고 몇 학번이냐고 물었것다?"
술잔을 단번에 비우고 소리쳤다
"나? 나는 오탁번이다! 어쩔래?"
몇 학번이냐고 따진 학생도
잠깐 생각에 잠겼다
'몇학번? 며탁번? 오탁번?'
으하하하
학생들이 배꼽을 잡았다
"내 학번은 오탁번이다, 왜?"
학생들의 뚜거운 손자국이 묻은
이빠진 술잔들이
멋도 모르고 어지럽게 돌고 돌았다
굴비
오 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빡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1943 충북 제천 출생.
고려대 영문과를 거쳐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6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철이와 아버지>가 당선.
1967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순은이 빛나는 아침에>가 당선.
1969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처형의 땅>이 당선.
1987 제12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시집「겨울강」으로 '동서문학상' 수상.
시「백두산천지」로 '정지용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아침의 예언>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1985
시집 <생각나지 않는 꿈>
시집 <겨울강>
시집 <1미터의 사랑> 시와시학사 1999
시집 <벙어리장갑> 문학사상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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