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괌, 동남아

톤레삽 호수와 Wat Thmdi(앗 트마이) 사원.

opal* 2009. 2. 28. 23:14

캄보디아 수상 가옥과 킬링필드 기념관 둘러보기.

 

 인공 호수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톤레샵 호수에 가기 전 인공호수를 잠시 둘러보느라 차가 섰다.

차에서 내리니 여자 어린이 우루루 모여드는데 바구니 하나씩 들고 있다.

관광객들과  자주 찾아 와 예뻐해 주는 가이드 옆으로 모여들며 반갑게 맞이한다. 

남자애들은 학교엘 갔는지 일하러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여자 애들만 보인다.

빈손 내밀며 "원 달라~ 원 달라~" 요구하지 않고 바구니 안에 물건을 담아 와 팔고 있다.

손으로 만든 팔지가 3개에 US 1$, 팔지 쓰일곳이 없어 그냥 돈을 주니 가이드가 말린다.

 

잠시 쉬었다 떠날 즈음되니 차 안에 오른다.

가이드가 노래를 시키니 서슴없이 노래 몇 곡 부르는데 발음이 괜찮다.

맨 앞 빨간티셔츠 입은 어린이는 키는 작아도 나이가 제일 많은 11살로 성장이 멈춘 아이란다. 

밝은 표정으로 지내고 있는 이 아이들에게 건강과 행운이 늘 함께 하기를 빌어주고 싶다.

 

 

 

 

 

 

톤레샵 호수

크메르인들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황토흙을 실어나르기 때문에 탁한 황토색을 띤다. 해질녁

물빛이 황금색으로 물들 때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는데 바쁜 일정이라 그 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호수는 캄보디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지리적인 경이물 중의 하나이다.
호수의 길이는 160km, 너비가 36km에 이른다.
건기에는 3,000km2의 면적에 수심 1m 정도를, 우기에는 10,000km2 면적에 12 m 수심이 된다.
풍부한 민물 어류가 있고, 이러한 자원은 물새나 수생동물, 양서류가 살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우기가 시작되는 6월 이전까지는 습지에서 고기를 잡는 많은 물새들을 볼 수 있단다.

차에서 내리니 어린 아이들 모여 들며 손을 내밀고 "원 달라, 원 달라" 외치며 달란다.

한국 전쟁 직후 미군만 보면 손 내밀며 "기브미 쪼코렛" "기브미 껌"  50~60년 전 우리나라 어린이 모습 같다.

한 아이는 디카를 들고 달려와 셔터를 누른다. 디카를 보니 문명의 헤택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한 바퀴 돌아 배가 돌아올 때 쯤이면  사진을 인화 하여 배에서 내리면 각자 찾아 가라며 펼쳐 보인다.

 

일일이 손으로 밀고 삿대로 밀며 수로 따라 출발한다.

 

뱃전 사다리에 앉아 있는 이 아이, 형들 일 하는 것 구경이나 하러 나온 아이로 알았다.

나이어린 젊은이들이 생활 전선에 나와 일하고 있다.

 

수상 마을.

씨엠립에서 버스를 타고 톤레샵 호수쪽으로 약 40~50분을 가다보면, 야트막한 140m 정도의 산이 보인다.
이 산은 이곳 캄보디아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우기 때는 산 허리가 선착장으로 변한다.

이 지역의 사람들의 생활은 건기와 우기에 따라 뚜렷이 구분된다.
건기 때에는 이곳 지역이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로 변하고 우기 때에는 톤레삽 호수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때가 되니 알아서 일어나 일을 거둔다, 본인만이 해야 할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불편 모르는 여유로워 보이는 삶.

 

수상 마을의 학교 시설.

 

강가에서 낚시하는 사람도 있고 강물에 들어서서 낚시하는 사람도 보인다.

 

 

 

한국 청년단체에서 세운 시설.

 

 

황톳빛 물빛은 파도가 사나울 것 같은데 호수라 그런지 잔잔하다.

 

수상 가옥들은 우기 때가 되면 물이 불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배 앞 사다리에 조용히 걸터앉아 있던 어린 도우미, 도착할 시간이 되니 벌떡 일어나 또 한 몫 거든다.

 

 6. 25 전쟁 직후 우리나라 어린아이들을 보고 있는 듯... 

 

 북한 음식점에서의 점심 식사. 넓은 식당 내에는 남한 관광객으로 꽉 차 빈 자리 하나 없다.

첫날부터 딴지 걸던 님,  마지막날까지 ㅎㅎㅎ... 결국 식사도 다른 음식점으로 가 따로... 

'그러면 집에나 있던지, 아님 혼자 다니던지, 가는 곳곳마다,  연세도 많으신 분이...'  

그동안 무던히도 참았던 일행들 모두 한 마디씩 쏟아낸다. 他山之石으로 삼을 일이다.

 

 

 

 식사를 마치고나면 서비스하던 종업원들의 가무가 이어지며 여흥의 시간으로 바뀐다.

 

Wat thmei(앗 트마이) 사원.

앙코르유적지 입구에서 약 1.5km 거리에 있다.

 

킬링필드 시 학살된 희생자들의 위령탑(유골 보관).

1975년, 캄보디아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좌익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는

4년동안 이전 정권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을 자행. 대규모 집단농장 이주, 가혹한 노동과 고문등을 자행하였다.

'킬링필드'라고 알려진 대학살에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노동자, 농민, 어린이까지 150만명 이상이 희생 되었다.

 

 무자비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참상과 대학살 주동자 폴 포트(Pol Pot, 본명;살로트 안사르, 1925∼1998)

 

베트남 전쟁당시 캄보디아는 중립을 선언, 나중에 베트남으로 기울자

미국은 베트남의 땅굴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많은 폭탄을 캄보디아에 쏟아 부었다.= 1차 킬링필드.

잘살던 캄보디아는 이에 페허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갔다.(한국 전쟁 때 원조 국가)

 

폴 포트는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적 불교사원에서 6년간 생활, 그중 2년간은 승려로 지냈다.

프놈펜의 기술학교에서 1년간 목수일을 배웠고, 1940년대에 호치민 휘하에서 반(反)프랑스 저항운동에 가담.

1946년부터는 캄보디아 공산당원이 되었다. 파리로 유학하여 학문보다는 혁명 활동에 더 관심이 많았다. 

 

  폴포트는 중국의 모택동 사상과 주의에 관심이 많았다. 시아누크 국왕체제에 불만을 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이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폴 폿(후에 미국이 학살자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다)은

시골 어린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주입시키고 먹을 것과 총을 준다. 이들은

론놀정권(미국이 만든)보다 폴폿에게 충성하는 마음으로 크메르 루즈를 결성하여 수도 프놈펜을 공격한다.

'똑같이 벌어 똑같이 나누어 갖는다'는 말은 없는사람들에겐 더 달콤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

 

프놈펜의 지식인들을 학살하다가 나중엔 프놈펜에서 풍요롭게사는 사람들까지 마구잡이로 고문하고 죽인다.

이것이 2차 킬링필드이다.

 

 거나하게 먹은 점심식사 시간 지난지가 얼마 안되는데 또 저녁 식사.

 

 씨엠 립 공항에서 호치민 공항으로,   출국 수속 때도 여지없이 급행료 US 1$.

캄보디아에선 필수라지만, 선답자들이 만들어 놓은 관행은 언제까지 지속 될런지... 아 옛날이여~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엥서 베트남 호치민 공항으로 이동.

 

 이륙 후 내다본 서녘하늘, 구름속으로 조망되는 모습이 얼마나 멋지던지...

 

  

 

 

 저녁 먹은지 얼마 안되었지만, 씨엠 립공항에서 호치민 공항은 비행거리도 짧아 간단하게 빵 하나. 

 

 베트남 호치민 공항에 도착하여 인천공항 가는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 4시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