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조 지훈 - 사모, 산, 산길, 승무.

opal* 2008. 9. 19. 23:18

 

 

사모

 

                                           조 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조 지훈

 

산이 구름에 싸인들
새 소리야 막힐 줄이

안개 잦아진 골에
꽃잎도 떨렸다고

소나기 한주름 스쳐간 뒤
벼랑 끝 풀잎에 이슬이 진다

바위도 하늘도 푸르러라
고운 넌출에

사르르 감기는
바람 소리

 

 

산길

 

                        조 지훈

 

혼자서 산길을 간다.
풀도 나무도 바위도 구름도 모두 무슨 얘기를 속삭이는데
산새 소리조차 나의 알음알이로는 풀이할 수가 없다.

바다로 흘러가는 산골 물소리만이
깊은 곳으로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그저 아득해지는 내 마음의 길을 열어 준다.

이따금 내 손끝에 나의 벌거숭이 영혼이 부딪쳐
푸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고
나의 마음에는 한나절 소낙비가 쏟아진다.

 

 

 

승무(僧舞)

                                         조 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을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 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본명 조동탁 호는 芝薰
1920년 12월 3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 출생
1939년 ≪문장≫을 통하여 <고풍의상>,<승무>,<봉황수> 등으로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단
1941년 혜화전문 문과졸업
1941년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 강사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조직
1946년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유문화사)간행
1948년 고대 문과대 교수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역임
1959년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1968년 5월 17일 사망
1973년 "조지훈전집"(일지사) 전7권 간행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청록집>(공저) 을유문화사 1946
시집 <풀잎단장> 창조사 1952
시집 <조지훈시선> 정음사 1956
시집 <역사 앞에서> 신구문화사 1959
시집 <여운> 일조각 1964
시집 <청록집·기타>(공저) 현암사 1968
시집 <청록집·이후>(공저) 현암사 1968
시집 <승무> 삼중당 1975
시집 <조지훈> 한국현대시문학대계19 지식산업사 1982
시집 <조지훈시집> 정음문화사 1983
시집 <승무> 정음문화사 1984
시집 <깊은 밤 홀로 깨어나> 영언문화사 1985
시집 <승무> 자뉴문학사 1987
시집 <동문서답> 범우문고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