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
박 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취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얼굴
박 인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데......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 -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고향에 가서
박 인환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繪畵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기 나는 銅像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엔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感傷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悲愴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부르던
그것뿐이다.
비 내리는 斜傾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工兵이
나에게 손짓을 해준다.
어린 딸에게
박 인환
기총과 포성의 요란함을 받아가면서
너는 세상에 태어났다 주검의 세계로
그리하여 너는 잘 울지도 못하고
힘없이 자란다.
엄마는 너를 껴안고 삼 개월 간에
일곱 번이나 이사를 했다.
서울에 피의 비와
눈 바람이 섞여 추위가 닥쳐오던 날
너는 입은 옷도 없이 벌거숭이로
貨車 위 별을 헤아리면서 남으로 왔다.
나의 어린 딸이여 고통스러워도 애소도 없이
그대로 젖만 먹고 웃으며 자라는 너는
무엇을 그리 우느냐.
너의 호수처럼 푸른 눈
지금 멀리 적을 격멸하러 바늘처럼 가느다란
기계는 간다. 그러나 그림자는 없다.
엄마는 전쟁이 끝나면 너를 호강시킨다 하나
언제 전쟁이 끝날 것이며
나의 어린 딸이여 너는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인가.
전쟁이 끝나면 너는 더욱 자라고
우리들이 서울에 남은 집에 돌아갈 적에
너는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그런 계집애.
나의 어린 딸이여
너의 고향과 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
그때까지 너에게 알려줄 사람이
살아 있을 것인가.
1926 강원도 인제 출생
평양 의전 출생
1946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하며 등단
1949 5인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발간
1955 시집 <<박인환시선집>> 발간
<<신시론>> 동인
1956 사망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박인환시선집>> 산호장 1955
시집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근역서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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