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 돌아 가는 길
박노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길
박노해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아무것도 두려워 마라
그대는 충분히 고통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자신을 잃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걸어라
너만의 길로 걸어 가라
길을 잃으면 길이 찾아온다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동그란 길로 가다
박노해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나뭇가지 사이에 기다리고 있다가
오늘도 잘했다는 칭찬 건네고
비탈길 내려딛는 속도 보다 더 빠르게
쏜살같이 서산 넘어 자취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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