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만 - 겨울 들판을 거닐며, 풀꽃은 풀꽃끼리, 이름을 지운다, 가는 길

 

 

겨울 들판을 거닐며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 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도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조만치 밀려오는 햇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품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 것도 키울 수 없을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풀꽃은 풀꽃끼리 

                                                                                  허형만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가난이야 하나님이 주신 거
때로는 슬픔의 계곡까지 몰려갔다가
저리 흐르는 게 어디 바람뿐이랴 싶어
다시금 터벅터벅 되돌아오긴 하지만
도회지 화려한 꽃집이 부러우랴
밤안개 아침 이슬 모두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외로움이야 하느님이 주신 거
사람 속에 귀염받는 화사한 꽃들은
사람처럼 대접받고 호강이나 하겠지만
때로는 모진 흙바람 속에
얼마나 시달리며 괴로워하리.
때로는 무심히 짓밟는 발에 뭉개져
얼마나 피눈물을 흘리리.
시르렁 시르렁 톱질한 박일랑
우리사 연분없어 맺지 못해도
궂은 날 갠 날도 우리 함께이거늘
풀꽃은 풀꽃끼리 외롭지 않네.

 

 

 

이름을 지운다

 

                                                                           허형만

 

수첩에서 이름을 지운다

접니다... 안부 한 번 제대로 전하지 못한

전화번호도 함께 지운다

멀먼 먼대로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살아생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으로 이름을 지운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몸이 먼저 아는지

안경을 끼도도 침침해 지는데

언젠가는 누군가도 오늘 나처럼

나의 이를을 지우겠지

그 사람, 나의 전화번호도

함께 지우겠지

별 하나가 별 하나를 업고

내 안의 계곡 물안개 속으로 스러져가는 저녁

 

 

 

가는 길

 

                                                  허형만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실성했다 해도
허파에 바람 들었다 해도
이제부터는 그냥
웃기만 하기로 했다
내가 가는 길
훤히 트이어 잘 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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