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시(祝詩)
류근
내가 당신을 귀하게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귀한 사람으로 대접받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여겼던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지길 바랍니다
내 가장 아픈 곳을 밝혀 사랑한 것만큼
누구에게든 가장 깊은 사랑의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지나간 날들이 당신에게 슬픔의 기록으로 남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고통과 자기 연민의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런 기억도 추억도 아니길 바랍니다
어떤 계절에 내린 비
어떤 가을날에 떨어진 잎사귀 하나쯤의 일로
고요하게 지나간 날들이길 바랍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지는 않겠습니다
내 기도가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당신은 당신의 기도로
나는 나의 기도로
서로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살아서 다시는 서로의 빈 자리를 확인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의 부재가 위안이 되는 삶이길 바랍니다
내가 당신의 손을 놓아준 힘만큼
당신도 누군가의 손을 가장 큰 힘으로 잡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노래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류근 시인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나 이후 공식적인 작품 발표는 하지 않았다.
미학적 · 사회적 귀환을 공식화한 '상처적 체질' 은 처량하게 용도 폐기한 '감상'이 오히려 힘이었고
앞으로도 그럴수 있음을 고지하는 역설적 텍스트이다.
류근은 '감상'의 힘을 대중의 감각에 의지한 통속미와,
비극과 희극의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 인간사의 본질을 통찰하는 희비극에서 발견한 듯 싶다.
그는 KBS의 교양프로 '역사저널 그날'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는, 시인으로서는 독특한 행보도 보이고 있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무어 참는 건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진짜 참는 거지.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는 게 무어 견디는 건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진짜 견디는 거지.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게 무어 사랑인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인 거지.”
자신을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이라 칭하는 류근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운명에 휘둘리거나 맞서기보다는
처음부터 견디는 쪽에 가깝다는 것을 생래적으로 깨치며,
세상을 견디는 것은 또한 개별적 존재들이 사무쳐 스러지는 소멸의 궁극에 닿을 때까지
중단 없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견딤’을 깨우치기까지...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노랫말을 쓴 시인
류근의 첫 산문집『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 2013.7.
나에겐
숨기고 싶은 과거가 아직 조금 남아 있다
어떤 밤엔 화해를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했다 그래도 과거를 생각할 때마다
그것이 지나갔다는 것 때문에 퍽 안심이 되었다
심야 상영관에서 나오면 문을 닫은 꽃집 앞에서
그날 팔리지 않은 꽃들을 확인했다 나 또한
팔리지 않으나 너무 많이 상영돼버린 영화였다
―「영화로운 나날」 부분
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내가 이별하는 동안 빗방울은 구름의 자세와 이별했고
우산은 나의 신발장과 이별했고 사소한 외상값은 현금지급기와 이별했다
몇몇의 벌레들은 영영 목숨과 이별하기도 하였다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하였다
[......]
그러니 나의 이별을 애인들에게 알리지 마라
너 빼놓곤 나조차 다 애인이다 부디, 이별하자
―「어떻게든 이별」 부분
어머니는 시집간 누이 집에 간신히 얹혀살고
나는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려 산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는 살아 있는 자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닮지 않으려고 억지로 몸을 비트는 나무들에게
어째서 똑같은 이름이 붙여지는지 하루 종일
봉투를 붙이면 얼마나 돈이 생기는지
생활비를 받아오면서 나는 생활도 없이 살아 있는
내 집요한 욕망들에 대해 잠깐 의심하고
의심할 때마다 풍찬노숙의 개들은 시장 쪽으로
달려간다 식욕 없는 나는 술집으로 슬슬 걸어간다
[......]
내가 일없이 취해서 날마다 취해서
숙취와 악취를 지병처럼 앓고 살 때
[......]
나는 또 누군가에게 빨리 들켜버려서
편안한 마음으로 절망하고 싶어진다 평화롭게
항복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어느 적군을 향해서
나는 나의 순결한 백기를 흔들어야 하는가
비틀거리며 돌아올 때마다 더 수직으로 빛나는
세상이여 나는 왜 이렇게 너희와 다른가
이렇게 닮지 않으려
몸을 비틀어야만 하는 건가
―「1991년,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부분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론 세상의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닌 한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
―「낱말 하나 사전」 전문
류근의 두 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2016.8.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배당. 목사도 없고, 헌금도 없고, 전도도 없고, 그냥 기도만 있는 곳.
평화와 안식이 풍금처럼 깃든 곳.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데도 예수의 고독을 믿는 사람이므로
가끔은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가 혼자 고요히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그러면 나는 곧 그 첨탑 뒤로 십자가보다 맑게 흐르는 구름들에 대하여 다정하게 예배할 수 있었다.
구름들아, 안녕. 나도 지금 너희처럼 흘러가고 있는 중이란다.
우리 어느 하늘 아래서든 아주 사소한 눈빛으로 또 만나자.
그 예배당에 가고 싶다. 기도가 필요한 시절이다. 세상의 모든 그대들을 위한 기도.
―「예배당에 가고 싶다」 중에서
오늘은 하루 종일 생일이었다.
하루 종일 생일이었으므로 하루 종일 미역국을 두 번 먹고,
오래 살려면 생일에 국수를 먹어줘야 한다고 누가 그러길래 읍내 나가서 짬뽕도 한 그릇 먹었다.
하루 종일 세 끼나 먹은 생일이니까 어머니도 하늘에서 조금은 흐뭇해하셨겠지.
생일이란 건 어머니도 아프고 나도 아픈 날이었을 텐데
세상에 아직 살아남은 내가 대표로 세 끼나 먹었으니 이만하면 참 괜찮은 생일을 보낸 거 맞다고
내가 나에게 힘주어 이야기해주는 생일 자정 무렵이다.
―「생일」 중에서
나는 그토록 비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비에 관해 쓴 시가 거의 없다.
비 오는 날은 그냥 빗속에서 비를 살아버렸으므로 비를 다 탕진한 것이었다.
시에 데려다 쓸 비가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정작으론 사랑을 살아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별에 대해서 시를 쓰는 사람은 정작으론 이별을 살아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인이란 그리하여 모름지기 견디는 사람이다.
비도 견디고, 사랑도 견디고, 이별도 견디고, 슬픔도 견디고, 쓸쓸함도 견디고,
죽음도 견디고 견디고 견디어서 마침내 시의 별자리를 남기는 사람이다.
다 살아내지 않고 조금씩 시에게 양보하는 사람이다. 시한테 가서 일러바치는 사람이다…….
―「시인이란」 중에서
위로가 필요할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아침부터 울고 싶은 날, 나보다 먼저 슬픔이 일어나 눈시울을 깨우는 날,
마음 저쪽에서 고요히 들려오는 이름 하나 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바라볼 수조차 없는 사람.
그러나 생각만으로도 마음 안에 분홍의 꽃밭이 일렁이는 사람.
이런 사람 이 생애에서 한 번쯤 만났으면 됐지. 한 번쯤 눈 맞췄으면 됐지.
아침부터 울고 싶은 날은 참 다행이구나.
지워진 이름조차 살아와 이마에 손을 얹는다.
그립다고, 그립다고 나에게 고백할 수 있는 날은 참 다행이구나.
따스한 음성으로 나를 불러다가 나 또한 나에게 푸르른 술 한잔을 건네야지. 아아, 사람아.
―「지워진 이름조차 살아와 손을 얹는다」 중에서
산문집 <함부로 사랑에 속아주는 버릇>, 2018.5.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상처적 체질」 전문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사랑 때문에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게 된 한 여자의
짧았던 생애를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 구원은 없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검은 커튼 아래서 죽었다 나는 술집에서
낮술에 취해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술잔에 머리를 묻은 채 울었고 그날 함박눈이었는지
새 떼들이었는지 광장에 가득 내리던 무엇인가에 살의를 느꼈었다
삶에서 빛을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겨울은 위독하다
술 마시다 단 한 번 입술을 빌려주었던 대학 친구도
겨울에 죽었다 그녀는 프랑스 유학과 가난한 애인 사이에서 떠돌다
결국 오래 잠드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오랜 잠이
그녀에게 어떤 빛을 데려다주었는지 대답해주지는 않았다
아내가 사랑의 찬가를 듣는 한낮이 나는 무덤 같고
삶에서 아무런 빛을 꿈꾼 적 없는데도 위독해진다
사랑에 찬가를 붙일 수 있는 사람은 깊이 사랑한 사람이 아닐 것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의 남편이 되면서 내 사랑은
쉽게 불륜이 되었지만 모든 사랑이 불륜이 되는 삶만큼
구원 없는 세상이 또 있을까 싶어 나는 무서워진다 검은 커튼
아래서 짧은 유서를 쓰던 그녀 역시 무섭지 않았을까
여긴 내가 사랑하기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고 썼던
친구 역시 무서웠을 것이다 무서워서
결국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삶을 건너가기 위해
그녀들은 얼마나 깊어진 절망으로 빛을 기다린 것일까
아내는 사랑의 찬가를 듣고 나는 빈방에서
겨울에 죽은 여자들의 생애를 생각한다 사랑 때문에
사랑을 버리는 일은 ...
<상처적 체질>. 2018.10.
누군가에게 색깔의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은 좀 더 오래도록 기억된다는 뜻이다.
색깔이 아니어도 무엇이든 선명한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은
기억의 끄트머리를 좀 더 오래도록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다.
분홍으로, 보라로, 하얀 빛으로, 장미 향기로, 물냄새로, 나무냄새로,
더러는 매콤한 술 냄새로, 바이올린으로, 피아노로, 트럼펫으로…….
이미지는 확실히 언어보다 힘센 뿌리를 가지는 법이어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는 시구의 진정성을 실감케 한다.
-류근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류근, 진혜원 (엮음) 202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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