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돌아 왔지요.
네거리에서
윤제림
길을 나설 구실을 만듭니다.
편지 한 통 부칠 일이 생기면
기쁘게 우체국에 갑니다.
부조금으로 쓸 현금을 찾으러
즐거이 은행 지점엘 갑니다.
일터에도 현금 지급기가 있지만
구태여 그곳까지 갑니다.
책 한 권 사러
삼십 분쯤 떨어진 책방에 갑니다.
혼자 점심을 먹게 되는 날은
휘파람을 불며
기사식당에 갑니다.
파주 장단콩으로 두부 요리를 잘하는 집이 있어
왕복 한 시간을 걷기도 합니다.
퇴근이 늦어지는 날 저녁이면
라면이나 우동 한 그릇을 먹으러
뒷산 언덕을 팔자걸음으로 넘어 갑니다.
지우개 하나를 사려고
골목길을 한참 걸어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가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갑자기
'말굽자석'이 생각나서
주변 초등학교 앞을
죄다 뒤지고 다녔습니다.
생각의 숙제 하나를 풀다가
문득 그 물건이 떠올랐지요.
'근처에 있는 쇳가루를
모조리 끌어당기는 그 물건처럼,
필요한 생각들을
살뜰히 끌어 모아주는
자석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체없이
그것을 사러 갔습니다.
그리하여 책상머리에
말굽자석 하나가 붙게 되었습니다.
점점 부실해지는 기억과
상상력의 부스러기들이
그것에 모여들기를 바라는
일종의 주술 입니다.
해가 바뀌면서
바보 같은 다짐 하나도
더 단단히 굳혀보려 합니다.
'더 많이 걷자'.
별다른 '몸 살림'의 지혜도
노력도 없는 제게,
걷기는 거의 유일한 운동입니다.
'다리는 옛날로 돌려보내자.
머리도 가끔은
시골길로 내려보내자.
궁벽한 산촌에 살던
20세기 농부를 그려보자.
시오리 길을 걸어서
군청에 다녀오고,
낫이나 호미 한 자루를 사 들고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오는 농부처럼
웬만한 길은 걸어서 다녀보자.
시로 옮겨보기도 했던
청량산 스님의 하루도
흉내 내보자'.
어느 날인가는 슬그머니
산길 사십 리를 걸어 내려가서
부라보콘 하나를 사 먹고
산길 사십 리를
걸어서 돌아왔지요.
졸시, '어느 날인가는' 전문
라디오에서 들은 어떤 스님 이야긴데
그게 끝입니다.
싱겁죠?
새해 아침 네거리에서
자주 허물어지는 마음을 경계를
다잡아 봅니다.
회사원 시절 근무시간에
거리로 나설 때
책상머리에
써 붙여두던 문구를 생각합니다.
'Walk = work'
이런 뜻이지요.
'저는 지금
어딘가를 걷고 있습니다.
(물론, 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제게 준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걷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가로 열쇠',
제 곁을 지나는 사람은
저를 위한 '세로 열쇠',
네거리는
'십자말풀이' 난을 닮았습니다.
아니,
세상은 거대한'숨은그림찾기판'.
저는 지금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워커(Walker): '걷는 사람', 6.25때 미사령관 '월턴 워커'(作名)
walk [wɔːk] 걷다. 보행, 산책하다.
work [wəːrk] 일하다, 연구, 작업, 작품, 작동하다.
윤제림 (1960년 1월 21일 ~ )충북 제천.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1983.~1993.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서울예술대학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제14회 지훈문학상, 불교문예 작품상, 동국문학상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에 〈봉구할아버지 커다란 손〉이,
같은 해 《문예중앙》에 시 〈뿌리 깊은 별들을 위하여〉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21세기 전망’동인으로 활동,
시집
《삼천리호 자전거》 (우경, 1988), (문학동네, 1997)
《황천반점》 (민음사, 1994)
《미미의 집》
《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2001)
《그는 걸어서 온다》 (문학동네, 2008)
《강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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