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나무- 도 종환,김 재진, 박 재삼, 안 도현, 김 윤성, 이제하, 곽 재구, 유 하, 박 남수, 성 낙희, 안 찬수, 이 형기, 정 지용, 이 성선, 박 목월

opal* 2007. 6. 2. 01:35

 

 

나무   /도종환

 

 퍼붓는 빗발을 끝까지 다 맞고난 나무들은 아름답다
 밤새 제 눈물로 제 몸을 씻고
 해 뜨는 쪽으로 조용히 고개를 드는 사람처럼
 슬픔 속에 고요하다
 바람과 눈보라를 안고 서 있는 나무들은 아름답다
 고통으로 제 살에 다가오는 것들을
 아름답게 바꿀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잔가지만큼 넓게 넓게 뿌리를 내린 나무들은 아름답다
 허욕과 먼지 많은 세상을 간결히 지키고 서 있어 더욱 빛난다
 무성한 이파리와 어여쁜 꽃을 가졌던
 
 
겨울 나무는 아름답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도
 결코 가난하지 않은 자세를 그는 안다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룬 숲은 아름답다
 오랜 세월 인간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해 더욱 아름답다

 

 

나무  /김재진

 

문득 눈 앞의 세월 다 지워지고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수첩 속에 빽빽하던 이름들 하나같이
소나기 맞은 글씨처럼 자욱으로 번질 때
흔적도 없이 사라져갈
사람이 아름다울 때 있다.
세파에 치여 각양각색인
남루 또한 지나간 상처마냥 눈물겹고
서 있는 사람들이 한 그루 나무처럼
이유없이 그냥 아름다울 때 있다.
가파른 세월이야 지나면 그뿐,
코끝을 감고 도는
한 자락 커피 향에 두 눈을 감고
비 맞는 나무처럼 가슴 적시는
무심한 몸놀림이 아름다울 때 있다.

 

 

나무   /박재삼

 

바람과 햇빛에
끊임없이 출렁이는
나뭇잎의 물살을 보아라.

사랑하는 이여,
그대 스란치마의 물살이
어지러운 내 머리에 닿아
노래처럼 풀려 가는 근심,
그도 그런 것인가.


사랑은 만 번을 해도 미흡한 갈증(渴症),
물거품이 한없이 일고
그리고 한없이 스러지는 허망이더라도
아름다운 이여,
저 흔들리는 나무의
빛나는 사랑을 빼면
이 세상엔 너무나 할 일이 없네.

 

 

나무   /안도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시사철 나무가 버티는 것은
귀뺨을 폭풍한테 얻어맞으면서
이러 저리 머리채를 잡힌채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어이, 버티는 것은
이제 막 꼼지락꼼지락 잎을 내밀기 시작하는 어린 나무들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버티는게 나무의 교육관이다
낮은 곳을 내려다볼 줄 아는 것,
가는 데까지 가 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주며
아름답다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주며
나무는 버틴다


나무라고 해서 왜 가지가지 신경통을 모르겠으며
잎사귀마다 서러움으로 울컥일 때가 왜 없었겠는가
죽어버릴 테야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 휘저어 보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트럭을 탄 벌목꾼들이 당도하기 전에
그냥 푹, 고꾸라져도 좋을 것을
죽은 듯이 쓰러져 이미 몸 한쪽이 썩어가고 있다는 듯이
엎드려 있어도 될 것을 나무는
한사코 서서, 나무는 버틴다

체제에 맞서 제일 잘 버티는 놈이
제일 먼저 눈밖에 나는 것,
그리하여 나무는
결국은 전생애를 톱날의 아구 같은 이빨에 맡기고 마는데,

여기서 나무의 생은 끝장났다네, 

저도 별 수 없지, 하고속단해서는 안된다
끌려가면서도 나무는 버틴다
버텼기 때문에 나무는 저를 싣고 가는 트럭보다 길다
제재소에서 토목토막으로 잘리면서 나무는
뎅구르르 나뒹굴며
이제 신의주까지 기차를 나르는 버팀목이 될 거야, 한다
나무는 버틴다

 

 

나무   /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황금색 햇빛과 개인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시작도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고 한다

 

 

나무   /이제하

 

 어릴 때는 저 나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다.
 그 이파리들이 던지는 풍성한 그늘이 마치 당연한 허구인 듯이,
 마시고 그냥 노래했을 뿐이다.

 서른 살에 저 나무는 반쯤 편 우산 같은 무리를 쓰고, 
 하늘 한켠에 외로운 모습으로 직립해 있었다.
 돈을 생각하며 걷는 갈짓자의 어지러운 발걸음 저편에
 그것은 아득하고 나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그저 그런 형상처럼만 보였다.

 내리막길이 보이는 고갯마루에 서서, 이제서야 문득 깨닫는다.
 나의 근원은 대체 어디에 연해 있는가.
 진심으로 내가 소원한 것은 숲의 무성함이거나 

 현란한 그 색채가 아니라
 깊고도 질긴 그 뿌리였다.
 길은 어둡고 일은 태산처럼 쌓여 있다.
 가장 확실한 모습으로 떨고 선 저 한 그루 나무

                

 

나무  /곽재구

 

숲속에는 
내가 잘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들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言語(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나무   /유하

 

잎새는 뿌리의 어둠을 벗어나려 하고
뿌리는 잎새의 태양을 벗어나려 한다
나무는 나무를 벗어나려는 힘으로
비로소 한 그루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나무   /박남수

 

나무는 뛰기 시작했다.

한동안
신록의 噴水로
하늘을 향해 뿜고 있더니,
이윽고 나무는
향기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조용한 여울을 지우며
애기의 눈가를 간지리어서
결국 터지는 웃음이 되었다.
그후는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全身으로 흔드는
지지지 노래를 울리면서
눈부신 빛깔---밝안 빛깔이
땅으로 投下되어
메마른 땅 속에서 爆發하고
나무는 四方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무   /성낙희

 

나무여
거대한 燭身이여.
한 점 씨앗에서
가지 끝까지
발돋움하는
맑은 향일성.

나무는
이승의 남루를 씻고
전생애 드러내는
우리들 내면의 모습
미구에 떠오를
나의 넋이니

내 죽어서
한 그루 무슨 나무로
여기 다시 푸를까
나무여
살아있는 촛불이여.

 

 

나무  /안찬수

 

아무도 이 나무의 세월을

다 알지 못한다

나무는 베어진 뒤에야
나이테의 둥근 물결로
자신이 살아온 나날의

바람과
비와
구름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뿐

아무도 이 나무의 세월을
다 알지 못한다

 


  

나무   /이형기

 

나무는

실로 운명처럼
조용하고 슬픈 자세를 가졌다.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그런 자세로
평생을 산다.

철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소란한 마을길 위에

스스로 펴는
그 폭넓은 그늘······

나무는
제자리에 선 채로 흘러가는
천 년의 강물이다.

 

 

나무   /정지용

 

얼골이 바로 푸른 한울을 울어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여 욕되지 않도다.

곡식알이 거꾸로 떨어저도 싹은 반듯이 우로 !
어느 모양으로 심기여젔더뇨? 이상스런 나무 나의 몸이여 !

오오 알맞는 位置 ! 좋은 우아래 !
아담의 슬픈 遺産도 그대로 받었노라.

나의 적은 年輪으로 이스라엘을 二千年을 헤였노라.
나의 存在는 宇宙의 한낱 焦燥한 汚點이었도다.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어 입을 잠그듯이
이제 그리스도의 못박히신 발의 聖血에 이마를 적시며 !

오오 ! 新約의 太陽을 한아름 안다.

 

 


나무   /이성선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 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나무   /박목월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은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門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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