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김 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그 여자네 집.

opal* 2005. 7. 2. 14:53

 

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 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면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꽃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미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그 여자네 집

 

                           김 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박 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리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이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 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갔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 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볼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 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 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 놓은 쌀밥 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 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그 여자네

생각 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1948 전북 임실 출생
1982 <<창작과비평21신인작가상>>에 시 <섬진강1>을 발표
1986 제6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 제12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2002 제11회 소충사선문화상 수상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시집 <맑은 날> 창작사 1986
시집 <꽃산 가는 길> 창작과비평사 1988
시집 <누이야 날이 저문다> 청하 1988
시집 <그리운 꽃편지> 풀빛 1989
시집 <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