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마종기- 우화의 강. 이름 부르기, 과수원에서.

opal* 2005. 8. 31. 09:24

  

우화의 강

 

                       마 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 하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 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짜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이름 부르기

 

                              마 종기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검은 새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운문의 목소리로 이름 불러대면
어느 틈에 비슷한 새 한 마리 날아와
시치미떼고 옆가지에 앉았다.
가까이서 날개로 바람도 만들었다.

아직도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그 새가 언제부턴가 오지 않는다.
아무리 이름 불러도 보이지 않는다.
한적한 가문 밤에는 잠꼬대되어
같은 가지에서 자기 새를 찾는 새.

방안 가득 무거운 편견이 가라앉고
멀리 늙은 기적소리 낯설게
밤과 밤 사이를 뚫다가 사라진다.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는 게 보인다.
부서진 마음도 보도에 굴러다닌다.
목소리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었을까.

이름까지 감추고 모두 혼자가 되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과수원에서

 

                   마 종기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ㅡ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ㅡ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 되는구나.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나기를

 

 

 

 

1939년 일본 동경 출생
1959년 [현대문학]에 시 '해부학교실' 등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조용한 개선(凱旋)(1960), '두번째 겨울'(1965), '변경(邊境)의 꽃'(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등
연세대 의과대 및 서울대 대학원 의학과 졸업  
1959 <<현대문학>>에 시 <해부학교실>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8 3인 시집 <평균율1> 발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조용한 개선(凱旋)>    부민문화사  1960
시집 <두번째 겨울>    부민문화사  1965
시집 <변경(邊境)의 꽃>    지식산업사  1976
시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문학과지성사  1980
시집 <마종기시선(馬鐘基詩選)>    지식산업사  1982
시집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문학과지성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