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도종환- 접시꽃 당신,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 입니다.

opal* 2005. 5. 15. 21:34

  

접시꽃 당신

 

                                    도 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 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 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 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 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짓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어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 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 안은 듯

주체 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합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 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을 날을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당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 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 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삷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 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 입니다

 

                                                 도 종환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 입니다

별빛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 입니다

사랑은 고통 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것들을

우리 손으로 허물기를 몇 번

육신을 지탱하는 일 때문에 마음과는 따로 가는 다른 많은 것들 때문에

어둠 속에서 울부짖으며 뉘우쳤던 허물들을

또 다시 되풀이 하는 연약한 인간이기를 몇 번

바위 위에서 흔들리는 대추나무 그림자 같은

우리의 심사와 불어오는 바람 같은 깨끗한 벌빛 사이에서

가난한 몸들을 끌고 가기 위해 많은 날들을 고통 숙에서 아파하는 일 입니다

사랑은 건널 수 없는 강을 서로의 사이에 흐르게 하거나

가라지풀 가득한 돌자갈 밭을 그 앞에 놓아 두고

끊임없이 피 흘리게 합니다

풀잎 하나가 스쳐도 살을 버히고

돌 하나를 밟아도 맨살이 갈라지는 거친 벌판을

 우리 손으로 마르지 않게 적시며 지기며 가는 길 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깨끗이 괴로워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수 없이 제 눈물로 제 살을 씻으며

맑은 아픔을 가져 보았던 사람은 압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고통까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것들을

피하지 않고 간다는 것 입니다.

사람이 서로 살며 사랑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도 그러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우리 몸으로 선택한 고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