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 죽
안 도현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공양
안 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입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 왔다는 말
안 도현
어릴 때, 두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무우 말랭이
안 도현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 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 글썽 울었다
안동 식혜
안 도현
찹쌀을 고들고들하게 쪄서 엿기름에 물을 담고
생강즙과 고춧가루 물로 맛을 내 삭힌
이 맵고 달고 붉은 음식을 특별히 안동 식혜라 부른다
잘 삭은 밥알이 동동 뜨고
나박나박 썬 무와 배도 뜨고
땅콩 몇 알도 고명처럼 살짝 뜨는데
생전 이 음식을 처음 받아본 타지 사람들은
고춧가루에서 우러난 불그죽죽한,
그 뭐라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이 야릇한 식혜의 빛깔 앞에서
그만 어이없어
‘아니, 이 집 여인의 속곳 헹군 강물을
동이로 퍼내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건가?’
생각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진흙 메기
안 도현
짚불을 피우고 배를 딴 메기를 몇마리 던져넣었다
메기들은 내장도 없이 불꽃속으로 맹렬히 헤엄쳐 갔다
가문 방둑 잿빛 진흙에 대가리를 들이밀듯 꼬리지느러미로 땅을 쳤다
삶이란 부레도 없이 허공의 물위로 풀쩍 솟구쳐 오르기도 하는 것
붉은 열망이 가라앉아 뻣뻣해지자 저녁이 재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진흙이 다 된 메기들은 그때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달려들어 쫄깃한 진흙의 살을 뜯어먹으며
어쩌면 코밑에 메기 수염이 돋아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매생이 국
안 도현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는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하나?
뜨거운 울음이라고 해야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간절하게 참 철 없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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