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김 선우 - 대관령 옛길,

opal* 2008. 2. 1. 13:46

 

 

대관령 옛길

                             김 선우

폭설주의보 내린 정초에
대관령 옛길을 오른다
기억의 단층들이 피워올리는
각양각색의 얼음꽃

소나무 가지에서 꽃숭어리 뭉텅 베어
입 속에 털어넣는다, 火酒―

싸아하게 김이 오르고
허파꽈리 익어가는지 숨 멎는다 천천히
뜨거워지는 목구멍 위장 쓸개
십이지장에 고여 있던 눈물이 울컹 올라온다
지독히 뜨거워진다는 건
빙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것
붉게 언 산수유 열매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때로 환장할 무언가 그리워져
정말 사랑했는지 의심스러워질 적이면
빙화의 대관령 옛길, 아무도
오르려 하지 않는 나의 길을 걷는다
겨울 자작나무 뜨거운 줄기에
맨 처음인 것처럼 가만 입술을 대고
속삭인다, 너도 갈 거니?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 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 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만약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 선우

나는 그를 죽이는 중입니다
잔뜩 피를 빤 선형동물, 동백이 뚝뚝 떨어지더군요

그는 떨어져 꿈틀대는 빨간 벌레들을 널름널름 주워 먹었습니다

나는 메스를 더욱 깊숙이 박았지요......

마침내 그의 흉부가 벌어지며 동백꽃이 모가지째 콸콸 쏟아 집니다

피 빨린 해골들도 덜걱덜걱 흘러나옵니다

엄마 목에 매달린 아가 해골이 방그레 웃습니다

앉은뱅이 해골이 팔다남은 사과를 내밉니다

사과는 통째 곯았습니다 그가 번쩍, 눈을 부릅뜹니다

흘러나온 것들을 단숨에, 뱃속에 도로 집어넣습니다......

나는 날마다 그를 죽일 궁리를 합니다

비대해져 살갗이 몸에 맞지 않게 된 그는 쪼가리 살갗을 들고 매일 내 방으로 옵니다

나는 그의 몸피에 새로 난 살갗을 재봉질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 일로 생계를 꾸려가지요)

그의 몸은 가속으로 거대해져갑니다 숱한 살갗을 어디에서 벗겨오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싱싱한, 피냄새가 묻어 있습니다......

오늘 밤 나는 그를 죽일 겁니다 그는 내게 남은 마지막 진피를 원할 테지요,

자장가를 부르며 사타구니 살갗을 벗겨내겠지요

내일이면 그는 핑크빛 합성피부를 가져와 손수 박음질해줄 겁니다

리드미컬한, 노동요를 부르며, 나는 보너스를 받겠지요

한아름 붉은 동백꽃도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또한번 그를 죽였습니다
나를 고소할 수 있는 법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혀는, 그의 입속에, 비굴하고 착하게 갇혀있으니까요

 

 

 

나는 아무래도 무보다 무우가

 

                                            김 선우

무꾸라 했네 겨울밤 허리 길어 적막이 아니리로 울 넘어오면 무꾸 주까?
엄마나 할머니가 추임새처럼 무꾸를 말하였네
실팍하게 제대로 언 겨울 속살 맛이라면
그 후로도 동짓달 무꾸 맛이 오래 제일이었네

학교에 다니면서 무꾸는 무우가 되었네
무우도 퍽 괜찮았네 무우-라고 발음할 때 컴컴한 땅속에 스미듯 배이는
흰 빛 무우밭에 나가본 후 무우- 땅속으로 번지는 흰 메아리처럼
실한 몸퉁에서 능청하게 빠져나온 뿌리 한 마디 무우가 제격이었네

무우라고 쓴 원고가 무가 되어 돌아왔네 표준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는데,
무우-라고 슬쩍 뿌리를 내려놔야 ‘무’도 살만 한 거지
그래야 그 생것이 비 오는 날이면 우우 스미는 빗물을 따라 잔뿌리 떨며
몸이 쏠리기도 한 흰 메아리인 줄 짐작이나 하지

무우밭 고랑 따라 저마다 둥그마한 흰 소 등 타고 가는 절집 한 채씩이라도 그렇잖은가
칠흑 같은 흙 속에 뚜벅뚜벅 박힌 희디흰 무우사寺 ,
이쯤 되어야 메아리도 제 몸통을 타고 오지 않겠나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2001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 (당선詩 : 피어라, 석유!)
현재 '시힘' 동인

주요 저서 목록
첫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년 2월 1일
첫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작과비평사) 2002년 3월 20일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작과비평사) 2003년 10월
 

 

 

 시인 김선우(37?사진)씨의 시집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가 제9회 천상병 시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천상병 시상'은 시인 천상병(1930~1993)을 기리고 시문학 발전을 위해 제정된 상이다. '

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는 시의 완성도가 높은 데다

여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성적인 상상력의 내면 풍경을 한 단계 승화시킨 점을 높게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