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강 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사랑법
강 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있는 누워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강 은교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서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너를 사랑한다
강 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은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1945년 함남 홍원 생. 출생 후 100일만에 서울로 이주.
1964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졸.
1968년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
1968년 9월 ≪사상계(思想界)≫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 등단
1970년 [샘터]사 입사
- 김형영, 정희성, 임정남 등과 [70년대] 동인으로 활동
1971년 첫시집 <허무집>을 [70년대] 동인회에서 간행
1975년 산문집 <그물사이로>(지식산업사), <추억제>(민음사) 간행,
제2회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현대문학상 수상
제9회 소월시 문학상 우수상 수상
시집 <빈자 일기>(민음사,1977), <소리집>(82), <붉은 강>(84), <우리가 물이 되어>(86),
<바람노래>(87),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89) 등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문학사상사 2002
<초록 거미의 사랑> 창비 2006
[경향] 시세계 변화 : 존재 탐구의 문제 에서 사회 역사적 삶의 문제로 바뀜
-제1시집 [허무집](71) : 인간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인간의 감정이 거의 배제)
-시선집 [풀잎](74) 이후 문단의 주목 : 관념적, 개인적 차원에서 현실적, 공동체적 삶으로 관심을 바꿈
@ 제1부 : 허무집(68년 문단데뷔 ~ 71년까지)
@ 제2부 : 허무집 이후(73, 74년)
현 동아대 국문과 교수(1983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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