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황 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열 이열 삼열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뼈아픈 후회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신상(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 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본명 황재우
◈ 1952 전남 해남 출생.
◈ 1972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미학 전공) 입학.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
◈ 1973 문리대의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강제입영.
◈ 1979 서울대 인문대 철학과(미학전공) 졸업 및 동 대학원에 입학.
◈ 1980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연혁>이 입선.
◈ 1980 계간 ≪문학과 지성≫에 시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여 등단.
◈ 1980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 1981 광주 민주화 항쟁에 가담한 사유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
◈ 1983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로 『세계의문학』이 제정한 제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 1985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 계간 『세계의문학』 편집위원
◈ 1991 현대문학사가 제정한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 1993 '뼈아픈 후회'로 문학사상사에서 제정한 제8회 소설시문학상 수상
◈ 1994 한신대학교 문창과 교수 재직
◈ 1995 조각전(학고재 화랑) 개최
◈ 1999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로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
◈ 대산문학상 수상
◈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이며, 미술평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 <<시와경제>> 동인
◈ 주요 저서 목록
-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민음사 1985
-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한마당 1986
- 시집 <나는 너다> 풀빛 1987
- 시집 <게 눈속의 연꽃> 문학과지성사 1991
- 시선집 <구반포 상가를 걸어가는 낙타> 미래사 1991
- 시선집 <聖가족> 살림출판사 1991
- 시집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학고재 1995
-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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