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신 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즐거운 나의 집
신 경림
사랑방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은 텃도지가 밀려 잔뜩 주눅이 든 허리 굽은 새우젓 장수다.
건넌방에서는 아버지가 계신다.
금광 덕대를 하는 삼촌에다 금방앗간을 하는 금이빨이 자랑인 두집담 주인과 어울려
머리를 맞대고 하루 종일 무슨 주판질이다.
할머니는 헛간에서 국수틀을 돌리시고 어머니는 안방에서 재봉틀을 돌리신다.
찌걱찌걱찌걱......할머니는 일이 힘들어 볼이 부우셨고,
돌돌돌돌......어머니는 기계 바느질이 즐거워 입을 벙긋대신다.
나는 사랑방 건넌방 헛간 안방을 오가며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한다.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470, 충주시 역전동 477의 49, 혹은
안양시 비산동 489의 43,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227의 29.
이렇게 옮겨 살아도 이 그림은 깨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 아버지는 건넌방에, 할머니는 헛간에 어머니는 안방에 계신다.
내가 어려서부터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외지로 떠돈 건 이에서 벗어나고자 해서였으리.
어쩌랴, 바다를 건너 딴 나라도 가고 딴 세상을 헤매다가도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니.
저승에 가도 이 틀 속에서 살 것인가, 나는 그것이 싫지만.
어느새 할아버지보다도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는 나의 이 집이 좋아졌다.
사랑방과 건넌방과 헛간과 안방을 오가면서
철없는 아이가 되어 딱지를 치고 구슬 장난을 하면서
나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 그림 속에서.
숨어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신 경림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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