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안 도현 - 독거, 병어회와 깻잎,

opal* 2008. 2. 18. 15:44

 

 

독거

 

                                안 도현

 

 

나는 능선을 타고 앉은 저 구름의 獨居를 사랑한다

염소떼처럼 풀을 뜯는 시늉을 하는 것과

흰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 구름의 흠이긴 하지만,

잠시 전투기를 과자처럼 깨물어 먹다가 뱉으며,

너무 딱딱하다고, 투덜거리는 것도 썩 좋아하고

 

  그가 저수지의 빈 술잔을 채워주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도 좋아한다,

떠나고 싶을 때 능선의 옆구리를 발로 툭 차버리고 떠나는 것도 좋아한다

 

  이 세상의 방명록에 이름 석 자 적는 것을 한사코 싫어하는.

무엇보다 위로 치솟지 아니하며 옆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아.

대통령도 수도승도 아니어서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저 구름,

 

  보아라, 백로 한 마리가 천천히 허공이 될 때까지

허공이 더 천천히 저녁 어스름에게 자리를 내어줄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기만 하는

저 구름은, 바라보는 일이 직업이다

 

  혼자 울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밤을 새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보지도 못한 나는

그래서 끝끝내,

저 구름의 獨居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병어회와 깻잎

 

                            안 도현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 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제1부
공양
가을의 소원
독거
월식
세상의 모든 여인숙
명자꽃
빗소리
기차
고니의 시작(詩作)
공부
사라진 똥
탁족도(濯足圖)
곡비
고양이뼈 한 마리
조문(弔文)
기러기 알
구절초의 북쪽
목판화

제2부
수제비
무말랭이
북방(北方)
물외냉국
닭개장
갱죽
안동식혜
진흙메기
건진국수
예천 태평추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염소 한 마리
스며드는 것
무밥
콩밭짓거리
민어회
물메기탕
병어회와 깻잎
통영 서호시장 시락국
전어속젓
눈 많이 온 날
매생이국

제3부
백석(白石) 생각
허기
산가(山家) 1
산가(山家) 2
수련
응답
금낭화
둥근 방
칡꽃
나비의 눈
곡선들
겨울 삽화
오래된 발자국
쇄빙선
눈길
숭어
식구
물 건너는 자작나무
검은 리본

 

 

4년 만에 펴낸 아홉번째 신작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창비).

먹거리를 통해 옛 공동체의 원형을 복원하는 시편들이 유독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이번 시집은

제목도 ‘어릴 적 예천 외갓집에서 겨울에만 먹던’ 태평추를 그리며 쓴 ‘예천 태평추’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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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자라고 가끔 생각한다.

그 일이 비록 헛것이라 해도 괜찮다.

소리로 그물을 짜는 이 작업이야말로 헛것에 복무하는 일이므로.”

(여덟번째 시집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시인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