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김 종길- 설날 아침에, 매화, 雪夜, 풀꽃.

opal* 2008. 2. 7. 22:30

 

 

설날 아침에

 

                                김 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난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매 화

                          김 종 길

해마다 새해가 되면
매화분엔 어김없이 매화가 핀다.
올해는 바로 초하룻날 첫 송이가 터진다.

새해가 온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무슨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설날에 피어난 하얀 꽃송이!

말라 죽은 것만 같은 검은 밑둥걸,
메마르고 가냘픈 잔가지들이
아직 살아 있었노라고,

살아 있는 한 저버릴 수 없는 것을
잊지 않았노라고, 잊지 않았노라고,
매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매화가 핀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밖에선 매화빛 눈이 내리고 있다.

오천년도 너에겐
한나절 낮잠에 불과했던가.
네게도 소리칠 마지막 절규는 있었던가

 

 

雪 夜

 

               김 종길

 

눈 오면 그리움
한결 더하여

눈 속에 차운 볼이
꽃으로 피네.

말없이 밟아가는
어스름길에

눈은 소리없이
쌓여만 가고,

西天엔 눈보라와
보라빛 落照,

어디메 먼 곳엔
그리운 靑山

 

 

풀 꽃

                      김 종 길

민들레꽃을
30분의 1로 축소하면
저 꽃이 될까.

잔디풀 사이로
가늘게 치밀어 올라
이제 막 피어난 자잘한 풀꽃!

별보다도 작은 꽃둘레건만
별처럼 또렷한 샛노란 꽃잎,
사나흘이면 소멸해 버릴 이름도 없는 저 별은

몇백 몇천 광년의 기약 끝에
드디어 여기
나타났는가.

그 가늘디 가는 천공의 선율은
적막한 내 뜰을 한껏
설레이게 한다.

 

 

 

 

1926 경북 안동 출생  
       혜회전문학교 국문과, 고려대 영문과 및 동국대 대학원 졸업  
1955 <<현대문학>>에 시 <성탄제>를 발표하며 등단  
1986 <<김종길시전집>>발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성탄제(聖誕祭)>    삼애사  1969
시집 <하회(河回)에서>    민음사  1977
시집 <황사현상>    민음사  1986
수필집 <산문>    범우사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