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에
김 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난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매 화
김 종 길
해마다 새해가 되면
매화분엔 어김없이 매화가 핀다.
올해는 바로 초하룻날 첫 송이가 터진다.
새해가 온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무슨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설날에 피어난 하얀 꽃송이!
말라 죽은 것만 같은 검은 밑둥걸,
메마르고 가냘픈 잔가지들이
아직 살아 있었노라고,
살아 있는 한 저버릴 수 없는 것을
잊지 않았노라고, 잊지 않았노라고,
매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매화가 핀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밖에선 매화빛 눈이 내리고 있다.
오천년도 너에겐
한나절 낮잠에 불과했던가.
네게도 소리칠 마지막 절규는 있었던가
雪 夜
김 종길
눈 오면 그리움
한결 더하여
눈 속에 차운 볼이
꽃으로 피네.
말없이 밟아가는
어스름길에
눈은 소리없이
쌓여만 가고,
西天엔 눈보라와
보라빛 落照,
어디메 먼 곳엔
그리운 靑山
풀 꽃
김 종 길
민들레꽃을
30분의 1로 축소하면
저 꽃이 될까.
잔디풀 사이로
가늘게 치밀어 올라
이제 막 피어난 자잘한 풀꽃!
별보다도 작은 꽃둘레건만
별처럼 또렷한 샛노란 꽃잎,
사나흘이면 소멸해 버릴 이름도 없는 저 별은
몇백 몇천 광년의 기약 끝에
드디어 여기
나타났는가.
그 가늘디 가는 천공의 선율은
적막한 내 뜰을 한껏
설레이게 한다.
1926 경북 안동 출생
혜회전문학교 국문과, 고려대 영문과 및 동국대 대학원 졸업
1955 <<현대문학>>에 시 <성탄제>를 발표하며 등단
1986 <<김종길시전집>>발간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성탄제(聖誕祭)> 삼애사 1969
시집 <하회(河回)에서> 민음사 1977
시집 <황사현상> 민음사 1986
수필집 <산문> 범우사 1986
'詩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 도현 - 독거, 병어회와 깻잎, (0) | 2008.02.18 |
---|---|
김남조 - 겨울 바다, 편지, 겨울 애상. (0) | 2008.02.16 |
황 현 - 除夜 (0) | 2008.02.06 |
이 효녕- 섣달 그믐 밤. (0) | 2008.02.06 |
김 종해 - 어머니와 설날, 꿈꾸는 사람에겐 어둠이 필요하다, 그대 앞에 봄 (0) | 2008.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