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정 일근
나비 날개 같은 부드러운 오수에 빠진 봄날 오후
창문 아래 사월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누군가 사랑의 전화 버턴을 꼭꼭 누루고 있다.
뜨거운 목소리 앚혀진 첫사랑의 귓불을 간지럽히고
화사한 성문이 잠든 몸을 깨워 열꽃의 뜸을 놓는다.
누구일까. 저렇게 더운 사랑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내려다 보니 없다 아무도 없는 봄날 오후를 배경으로
담장안의 목련만이 저홀로 터지고 있다.
나에게 사랑이란
정 일근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무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부석사 무량수
정 일근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연가
정 일근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하루 스물 네 시간을,일년 삼백예순닷세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방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돌쩌귀 사랑
정 일근
울고 불고 치사한 이승의 사랑일랑 그만 끝을 내고
다시 태어난다면 우리 한 몸의 돌쩌귀로 환생하자
그대는 문설주의 암짝이 되고 나는 문짝의 수짝이 되어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우리 뜨겁게 쇠살 부비자
어디 쇠가 녹으랴만 그 쇠 녹을 때까지
우리 돌쩌귀 같은 사랑 한 번 해 보자
1958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국어교육과 졸업
문학 프로필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
1984년 실천문학(5권) 신인 작품 발표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5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1996년 문학의 해 기념 유공자 표창
1998년 한국문학 특별 창작지원금 수혜
2000년 한국시조 작품상 수상
2001년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교과서 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수록
2001년 시와 시학상 젊은시인상 수상
2003년 문예진흥기금(시집발간) 수혜
2003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사람과 산』편집위원, 계간 『열린시조』운영위원
시집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2001, 시와시학)
경주남산(1998, 문학동네)
감지의 사랑(1995, 빛남)
처용의 도시(1994, 고려원)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1993, 푸른숲)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1991, 빛남)
바다가 보이는 교실(1987, 창작과 비평사)
시선집
첫사랑을 덮다(1998, 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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