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으로 가고 싶다 / 이상국
벌써 오래 되었다
부엌 옆에 마구간 달린 아버지의 집을 떠나
마당도 굴뚝도 없는 아파트에 와 살며
나는 그게 자랑인줄 알았다
이제는 그 부드러운 풀이름도 거반 잊었지만
봄 둑길에 새 풀이 무성할 때면
우리 소 생각난다
어떤 날 저녁에는
꼴짐 지고 돌아오는 아버지 늦는다고
동네가 떠나갈듯 우는 울음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그 소도 아버지도 다 졸업했다고
이 도시의 시민이 되어 산지 오래인데도
우리 소 잘 먹던 풀밭 만나면
한 짐 베어지고
그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별과 함께
이 상국
사물에 대한 성실한 관찰과 살아움직이는 말의 움직임으로 영동 지역의 자연과 현실을 시에 담아온 이상국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이상국 시인은 전통적 서정에 뿌리를 두면서도 새로운 발상으로 분단체제 시인으로서의 역사의식을
견지한 시인으로 평가받아왔다. 특히 『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로 제1회 백석문학상을 황지우 시인과 공동수상하면서
장인으로서의 면모를 인정받았고 맑고 깨끗한 이미지의 창출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상국 시인이 일하는 곳은 백담사 만해 마을이다. 속초에 살면서 만해 마을까지 매일 출퇴근하느라 하루에 두 번 진부령을
넘어야 한다. 시인이 매일 넘어야 하는 진부령은 이 시집의 중심에 서 있다. 그 좌우로 펼쳐진 영동․영서 일대의
산천초목과 어둠, 짐승과 인간과 별이 바로 이상국 시인이 퍼다 쓰는 무한한 시의 원료인 셈이다.
이 원료 중 단연 이상국 시인만의 독특한 상상력으로 빛나는 것이 ‘어둠’이다. 보통 어둠은 내면을 드러내는 소재이다.
어둠의 뒤로는 늘 소외, 우울, 고독, 불행 들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이상국의 시에서 어둠은 자연 그대로의 어둠, 즉 깜깜함이다.
시인에게 어둠은 시인의 고향 양양 일대의 특산물인 것 같다. 시인은 이 산속 어둠에 웅크리고서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가라피의 밤」)을 생각한다. 여기서 시인의 성찰이 돋보인다.
시인에게 도회의 어둠이란 그냥 어둠일 뿐이고 산속의 어둠이야말로 진정한 빛이 되어 타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다고 말하며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으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가라피를 날아다닌”다고
노래할 수 있다. 「산방일기」 「저녁의 노래」 같은 시에서 이런 주제의식은 다채롭게 변주되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소재는 별이다. 윤동주(尹東柱)의 시에서처럼, 별은 보통 순수와 구원에의 염원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상국에게 별은 인간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이 별은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쓸데없이 가진 게 많은” 아메리카나 유럽 쪽으로 이 별이 돌 때면 “별은 망가질 듯 삐걱거린다”(「하나뿐인 별에서」) 그래서 시인은 이 별에서 내리고 싶어한다. “더 가난해지거나/ 시 같은 건 안 써도 좋으니” 시인은 부와 권력이 집중된 세계로만 치닫는 이 별에서 내려 다른 삶을 살고 싶다고 노래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이 무엇보다 예찬한 존재는 나무다. 그래서 시집의 맨 앞에 나무에 관한 시편을 실었는데, 이 나무들은
자연의 끝없는 생명력을 상징하는 동시에 성자와 같은 거룩함까지 지니고 있다. 「별 만드는 나무들」은 특히 아름답고
재미있는 시다. 시인은 별이 나무가 올라가 빛나는 것이며 나무는 별의 죽음을 받아낸다고 노래한다.
“밤에도 숲이 물결처럼 술렁이는 건/ 나무들이 별 수리하느라 그러는 것이다”와 같은 시구는 대자연과 함께 숨쉬며
이를 성실하게 관찰하지 않은 시인이라면 쓸 수 없는 깊이있는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시집은 어둠, 별, 나무들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 사이에 언뜻언뜻 비치는 인간의 얼굴은 대부분 문명과
세속적인 삶에 환멸을 느끼고 그것을 멀리 바라보는 시적 화자로 드러난다. 시인에게 그나마 친근하고 세상을 바르게 살도록
힘을 주는 사람들은 대개 주변인이다. 시인이 시 한편을 주었더니 원고료로 쌀을 보내준 철원의 정춘근 형(「시로 밥을 먹다」),
곡식이든 짐승이든 뭔가 심고 거두며 살다 간 아버지(「아버지가 보고 싶다」) 같은 이들이야말로 시인에겐 어느 성공한
도회인보다 훌륭하게 비춰진다. 특히 「벽에 기대어」에서 “뜯어낸 늑골 때문에/ 생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면/ 기우는
그 반대편에 삶의 온갖 잡동사니들을 얹어/ 용케 균형을 잡아가는 늙은 전사”로 묘사된 형님은 생의 모든 제약과
맞서 일어서는 한 인간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해설을 쓴 평론가 김윤태가 지적했듯이 낯익은 풍경을 누비며 그 풍경에서 우리 민족의 새로운 기운을 얻어내는
이상국 시인의 솜씨는 시인 백석(白石)에 잇닿아 있다. 이는 시인이 제1회 백석문학상 수상자였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시인 곽재구가 말하듯 누구든 이상국 시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어질고 선한 기운들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창비 Home-도서목록-전체 도서목록-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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