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박 경리- 가을, 대추와 꿀벌, 모순, 삶,

opal* 2008. 11. 5. 02:22

 

 

가을

 

                                    박 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나간 걸까

솜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라간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포한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대추와 꿀벌

 

                                박 경리

 

대추를 줍다가

머리

대추에 쳐박고 죽은 꿀벌 한 마리 보았다

단맛에 끌려 파고들다 질식 했을까

삶과 죽음의 여실한 한 자리

 

손바닥에 올려놓은 대추 한 알

 

꿀벌 반 대추 반

눈이 시리도록 푸른 가을 하늘

 

 

모순

 

                         박 경리

 

물은 어떠한 불도 다 꺼버리고

불은 어떠한 물도 다 말려 버린다

절대적 이 상극의 틈새에서

절대적인 이 상극으로 말미암아

생명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절묘한 질서인가

 

초나라 무기상이 말하기를

나의 창은 어떠한 방패도 뚫는다

다시 말하기를

나의 방패는 어떠한 창도 다 막는다

 

한 사람이 묻기를

당신의 창이 당신의 방패를 찌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무기상의 대답은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는 결론이 없다

우주 그 어디에서도 결론은 없다

결론은 삼라만상의 끝을 의미하고

만물은 상극의 긴장 속에서 존재한다

어리석은 지식인들이 곧잘 논쟁에 끌고 나와는 모순

방어와 공격을 겸한 용어이지만

그 자신이 모순적인 존재인 것을

알지 못한다

 

 

 

                               박 경리

 

대개 소쩍새는 밤에 울고

뻐꾸기는 낮에 우는 것 같다

 

풀 뽑는 언덕에 노오란 고들빼기 꽃

파고드는 벌 한마리

 

애닯게 우는 소쩍새야

한가롭게 우는 뻐꾸기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미친 듯 꿀 찾는 벌아

간지럽다는 고들빼기 꽃

모두 한 목숨인 것을

달 지고 해 뜨고 비오고 바람 불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곳

허허롭지만 따뜻하구나

슬픔도 기쁨도 왜 이리 찬란한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을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산다는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