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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kor Wat 1

opal* 2009. 2. 27. 23:12

현재 캄보디아 수도는 프놈펜,

씨엠 립(Siem Rdap)의 앙코르는 캄보디아 예전 수도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주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겠다.

9~15세기에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는 왕가의 중심지, 크메르 왕조는 이곳에서 동남아 역사상 가장 크게 번성하고

발달한 왕국을 다스렸다. 890년경 야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앙코르로 옮긴 때부터 13세기초까지,

수도가 다른 곳으로 옮겨졌던 잠시 동안과 외세의 침입으로 인한 위기시를 제외한  앙코르의 왕들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부분에서

북쪽으로 윈난[雲南]까지, 또 베트남에서 서쪽으로 벵골 만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통치기간에 지배자들은 자신들과 수도를 찬양하기 위한 일련의 거대한 건축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막대한 노동력과 부를 이용했다.

 

자야바르만 7세(1181~1215경 재위) 이후 왕국의 권력과 활력은 점차 쇠퇴하여 1431년 타이 군대에게 앙코르를 점령당하여

약탈당한 다음 마침내 버려졌다. 앙코르에서 위대한 건설과 축조는 300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이 동안 건축과 예술양식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종교의식은 시바 신과 비슈누 신을 섬기는 흰두교에서 

점차 관세음보살신앙이 퍼져나갔다.

근대 이전에 세워진 동남아시아의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앙코르도 통치의 중심지이자 신격화한 왕을 숭배하던 곳으로서,

인도에서 들여와 지역적 전통에 맞게 고쳐친 종교적·정치적 개념에 의거해 계획·건설되었으며

여러 번 재건되었다. 이 도시에 '야소다라푸라'라는 원래의 이름을 붙인 야소바르만 1세 때부터

앙코르는 인도의 전통적 우주론이 제시한 모델에 따라 세워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 도시는 중심부 산, 즉 피라미드형 사원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는데, 이것은 인도의 우주론에 등장하는

메루 산과 동일시되었으며 동시에 왕국의 번영이 달려 있는 토양의 힘을 집중시킨다고 믿었다.

 

 야소다라푸라로 명명되었을 당시의 중심부 산의 사원은 그 지역에 있는 자연 언덕인 프놈 바켄

적절히 변형시켜 만든 건축물이었으나 후대에 와서 전적으로 인공적인 건축물, 즉 피라미드 사원이 되었다.

이런 후대의 사원으로는 자야바르만 5세(968~1001 재위)의 피메아나카스 사원,

우다야디티아바르만 2세(1050~66 재위)의 바푸온 사원 및 불교사원인 바욘 등이 있다.

특히 바욘은 자야바르만 7세 때의 중심사원이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이 도시를 지금과 같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건립했는데

 이무렵에 도시는 앙코르 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이때에는 앙코르의 주요특징인 방대한 저수지·운하·해자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것들은 수량조절과 관개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우주론에서 우주 중심부의 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양의 상징이기도 했다.


우주론적 사고와 도시 자체의 관계는 도시의 주요 거주민과 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설정되었다.

중심부의 산 또는 피라미드나 사원은 '데바라자'라고 불리는 신격화한 왕이 주재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왕은 위대한 절대적 신격의 하나로 동일시되었고, 이런 동일시는

왕이 죽었을 때 중심부 사원을 왕의 개인 장례용 사원이나 무덤으로 삼음으로써 마무리되었다.

 

앙코르에 있는 다른 많은 사원들 역시 인도의 우주론과 신화적 주제를 표현하고 있으며, 중심부 사원을 새로 짓지 않은 왕이나

실질적 통치자가 아니었던 왕가 구성원, 또는 몇몇 경우에 특정 귀족들이 시바 신이나 왕국에서 섬기던 다른 주요신과

 자신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숭배장소로 세워졌다.

 

 앙코르 유적의 사원 가운데 가장 거창하며 유명한 앙코르와트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자신의 유해를 안치하고

 상징적·종교적으로 비슈누 신과 자신을 영원히 동일시할 수 있는 거대한 소우주의 건축물로 세운 것이다.

13세기말 이 곳을 찾은 중국의 무역사절 주달관(周達觀)의 생생한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는 그때까지도 번영을 누리던 거대한 도시였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장엄한 수도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무렵에는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기간 동안 극에 달했던 거대한 규모의 건축열이 확실히 끝나고,

상좌부로 대표되는 새롭고 보다 절제된 종교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 서부에 세워진 타이 왕국의 군대도 이미 크메르의 심장부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16세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경향은 도시의 폐기라는 형태로 절정에 이르렀고,

밀림으로 뒤덮인 고대 사원의 유해와 한때는 장대했던 저수지와 수로망의 폐허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고대도시가 멸망한 15세기초부터 19세기말까지 400년이 넘는 동안 앙코르에 대한 관심은

대부분 앙코르와트에 모아졌는데, 앙코르와트는 상좌부 승려들에 의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됨으로써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불교순례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시기에 캄보디아를 찾았던 초기 유럽의 방문객들은 '잃어버린 도시'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나타냈으며,

1863년 프랑스의 식민정부가 세워지자 이 유적 전체는 학문적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재능있고 헌신적인 프랑스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후에는 정부가 지원하는

프랑스 극동학교의 후원을 받아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여

앙코르의 역사와 생활을 이끈 흥미진진한 종교와 정치체계에 대해 오늘날 알려진 많은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고고학자들은 고생스럽고 힘든 복원계획을 실행함으로써

고대의 사원·저수지·운하망을 원래의 장관에 어느 정도 가깝게 복구했다.

1960, 1970, 1980년대초에 일어난 캄보디아의 정치적·군사적 소요 기간에

앙코르의 사원들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도굴당하기도 했으나 가장 큰 문제는 방치되었다는 점이었다.

관리 부족으로 건물들은 급속하고 무성히 자라는 식물과 침식을 유발하는 물, 기타 자연현상으로 황폐해졌다.

 

앙코르왓과 앙코르 톰 위성 사진.

 

'해자(垓子)'란 적과 동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덩이다.

보통 물로 채워진다, 가까운 일본에 가도 성 주위에서 볼 수 있다. (일본말로는 '호리')

 

 

이중 회랑으로 둘러싸인 앙코르 왓.

앙코르 왓 석조 건축물 중앙탑은 사원의 정 중앙에 세워져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

맨 위 3층 단에 5개의 큰 탑이 세워져 있고 중앙탑이 가장 높다. 탑들은 연꽃을 본따 만들었다.

모든 건물들은 동서를 축으로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1층은 미물계, 2층은 인간게, 3층을 천상계를 의미한다.

3개 층으로 이루어진 건축물 높이는 지면부터 213m나 된다. 전에 다녀온 지인의 말을 빌리면 "올라갈 땐 올라가는데

내려올 땐 아찔하여 고소 포증을 느낀다" 고 했다.지금은 3층을 개방하지 않아 올라 갈 수가 없다.

 

 

앙코르와트는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가  약 30년에 걸쳐서 축조된 캄보디아 씨엠립에 있는 사원으로서

옛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 가장 잘 표현된 유적이다,

앙코르 와트가 세계에 알려진 것은 1860년 프랑스 탐험가 앙리 모어가 밀림속의 유적을 발견함으로 시작되었다.

앙코르와트는 세계 최대의 석조 건물, 또한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지칭되며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에 지정되었으며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이다.
본래는 힌두사원이었다가 12세기경 불교사상이 결합되어 앙코르톰 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형식이 창조 되었다.

 하루에 둘러보기엔 시간도 체력도 부족한 앙코르 유적지.  사전 지식 갖고 와 며칠 둘러봐야 될 곳이다.

 

한국사람 입맛에도 잘 맞는 쌀국수로 아침 식사,

유적지 안에 들어가려면 입구에서 사진 찍힌 후 사진이 부착된 카드를 소지하고 들어가야 한다.

 

서쪽 정문, 건물 밖 둘레에 넓은 垓子(해자)가 있다. 머리가 많이 달린 코브라와 사자상이 지키고 있다.

 

건물 밖으로 만든 인공호수(해자)는 바다를 의미하며 이 해자를 건너기 위해 250m의 사암다리를 걸어야 한다.

이 해자에는 전에 악어가 살았었단다.

해자를 건너는 양쪽 고깔모자 쓴 신들과 투구쓴 악마가 머리가 일곱 달린 뱀 '나가(naga)'를 잡고 줄다리기하는 모습(힌두교 신화 우유 바다 휘젓기 형상)으로 난간이 장식되어 있다.

신의 형상 54, 악의 형상 54, 합쳐 불교에 나오는 108 번뇌의 상징이다.

 

캄보디아에서의 가이드와 머리가 여럿 달린 나가(코브라 )조각.

 

머리가 여럿 달린 '나가(Naga, 코브라)' 형상 조각물.

 

 

 

유네스코에 등재된 문화재, 일본이 경제적으로 돕는다며 복원 한다는 것이... 건물 기둥을 세멘트를 발라 놓았다. 차라리 그냥 놔두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서쪽 연못 앞에서 촬영, 탑 5개가 모두 반영 되었다.

 

연못가 나무그늘에 앉아 1차 설명을 듣는다.

앙코르 와트 주변은 유적지들이 거의다 사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암이 반출하는 복사열 때문에 더 덥다.

 

연못에 핀 수련.

 

 

사암으로 된 다리와 부서진 문화재 보호를 위해 나무계단을 이용한다.

 

 

사원 1층 회랑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는 60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고 내부 벽면엔 힌두 신화, 인도의 전설 등의 부조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다.  부조회랑 규모는 215m×167m.

서쪽회랑 - 쿠르크세트의 전투,  남서쪽 회랑 - Suryavarman 2세의 전투, 남동쪽 회랑 - 염라대왕의 심판,

동쪽 회랑 - 우유바다에 관한 전설. 서쪽회랑 - 랑카의 전투.

 

앙코르왓 회랑, 사방 4면 중 3면이 흰두교 설화를 바탕으로 한 조각이 양각으로 새겨져 섬세한 조각이 경이롭다.

회랑따라 돌며 군데 군데 서서 부조물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힌두교 설화에서 불교의 경전 내용이 모두 벽에 담겨져 있어 다 들으려면 몇 날 며칠을 들어야 될 것 같다.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지 못하면 이해 하기가 어렵다.

이곳은 관광이 아니라 이해가 필요한 곳이다. 그걸 모르고 찾아 왔으니...

 

천년 전의 앙코르,  앙코르의 이 돌덩이 왕국을 알려면 천년 전 이곳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먼저 알아야 한다.

앙코르 와트 회랑의 부조는 힌두교와 불교의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다.

 

조각된 사암은 손이 닿을 수록 윤이나는 성질이 있단다.

가이드이 설명은 부조의 그림 만큼이나 끝없이 이어진다. 신기하고 신비하고...

 

 

 

 

 

 

 

회랑 안 중앙에는 깊게 만들어 계단까지 있는 구조, 연못일까 목욕탕 이었을까?

 

내부 벽면의 아름다운 부조.

 

 

 

 

 

 

 

벽면뿐만 아니라 기둥에도 이와 같이 몇 단으로 나뉘어 모두 조각이 되어 있다.

 

 

 

 

 

 

 

원래 있었던 천장은 프랑스 식민지 때 프랑스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맨 윗쪽 지붕만 남아 있는가 하면,

일본정부의 후원으로 복원 공사를 하며 앙코르 왓 천정이나 벽면을 일본식 문양으로 바꾸어 놓기도 했으니

문화의 찬탈이며 만행이 아닐 수 없다.(위 사진 中 위 천정사진과 우측 꽃무늬사진)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쓰고 싶은데 너무 방대하여 손 대기조차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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