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동화) 정채봉 - 제비꽃

opal* 2009. 5. 1. 18:30

 

                                                                                                                  (원우의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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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정 채봉

 

  팬지화분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제비꽃이 있었습니다.

  화분이 꽃집에서 이 집으로 팔려 왔을 때 화분에는 팬자꽃 혼자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병아리 솜털 같은 봄볕이 며칠 계속해서 내리 쬐인 화분에서 제비풀이 쏘옥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니, 넌 누구야? 어떻게 여기에 숨어 들어왔지?"

  팬지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물었습니다.  

  "숨어 들어온 것이 아니에요. 억울하게 묻혀서 들어온 것이에요."

  "뭐라구? 숨어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묻혀 들어왔다고? 그런 말에 누가 속을 줄 알고?"

  "정말이에요. 우리는 봄을 기다리며 평화롭게 겨울잠을 자고 있었더요. 그러던 어느 날 꽃집 아저씨가 마차를 타고 들로 나왔어요.

그리고는 자고 있는 나랑 내 이부자리인 흙을 한꺼번에 퍼 담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실려 간 곳은 꽃집의 온실이었어요. 그 곳에서 당신이 화분에 심어질 때 우리 고향 흙이 사용된 거란알예요.

러니 나도 이부자리 속에 묻혀올 수밖에요."

  제비풀이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말하자 팬지의 퍼런 서슬은 수그러졌습니다.

  "그건 그렇겠다. 그러나 이 집 주인은 널 보고 거름 주고 물 주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네가 내 거름을 축내고 있다는 걸 알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왜 가만두지 않을 까요? 난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거름도 귀퉁이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먹잖아요."

  "한마디로 말해서 넌 볼품이 없는 풀이거든."

  "왜 볼품이 없어요. 오월이 되면 작을망정 꽃을 피우기도 하는데요."

  "하하하, 얘가 날 웃기는데. 네 꽃이 우리꽃을 당할 성 싶으냐? 우리는 꽃이 예쁘다고 소문나서 먼 나라에서 수입된 꽃이란 말이야."

  제비풀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외국에서 들여와 온실에서 보호받고 자랄 만큼 예쁜 꽃나무라는데  그런 꽃나무와 견준다는 것은

들찬에서 자란 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 날 이후, 제비풀은 팬지가 말을 걸어도, 약을 올려도 대꾸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그저 한쪽 귀퉁이에서 없는 듯이 숨을

죽이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물을 주러 나온 주인한테 제비풀은 들키고 말았습니다.

  "잡초가 있었군. 뽑아 버려야겠어."

  주인의 커다란 손이 제비풀을 향해서 다가왔습니다.

 '아,아! 엄마.'

  제비풀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아빠, 안 돼요. 그 작은 풀은 뽑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며 막아서는 아이는 이 집의 아들인 승태였습니다.

  "안 되다니? 이건 잡초야. 이런 잡초는 뽑아 버려야 하는 거야."

  "그래도 안 돼요. 어른이 있으면 아이도 있듯이 이런 풀도 있어야 해요."

  "어른이 있으면 아이가 있듯이…… 이런 풀도 있어야 한다. ……그래 네 말도 맞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제비풀은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승태를 보게 되는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어떤 때는 승태가 물조리를 들고 와서 뿌리가 흠뻑 젖도록 물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제비풀은 행복을 느꼈습니다. '나도 이젠 살 만해.'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뽐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4월 으느 날, 소나기가 지나간 날 한낮이었습니다.

  빛나는 햇살을 받으며 팬지가 드디어 꽃망울을 터뜨리자 승태는 그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팬지꽃에 넋을 잃었습니다.

  승태가 팬지꽃한테만 눈을 멈추고 팬지꽃 앞에서만 콧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승태가 팬지꽃 곁에서 그 환한 미소를 지을때 제비풀은 샘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비풀은 참았습니다.

아니, 자신은 정말로 시시한 풀이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팬지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면서 울먹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제비풀을 달래주는 것은 늙은 선인장이었습니다.

  "용기를 가져. 넌 제비풀로서 그만하면 훌륭한 거야."

  "그러나 내가 미운걸 어떻게 해요."

  "바보같은 소리. 너도 꽃을 가진 풀이야. 귀기울이고 네 몸 속의 소리를 들어 봐. 꽃을 피워내려고 열심히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소리가 들릴거야."

  선인장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 집에서 오래 살았습니다. 지금은 늙어서 반쪽이 꺼멓게 썩어 들어간 몸이지만

그는 어떤 어려운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슬기로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비풀은 선인장한테 물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뭔가요? 꽃잎이 크고 빛깔이 진하고 향기가 많이 나면, 그러면 아름다운 건가요?"

  "그런 것은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럼 진짜 아름다움이란 어떤 건 어떤 건 가요?"

  "아름다움이란 꽃이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가가 아니야. 진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게 좋은 뜻을 보여주고 그 뜻이 상대의 마음 속에

더 좋은 뜻이 되어 다시 돌아올 때 생기는 빛남이야."

  "그럼 나 같은 못난이는 그런 아름다움을 가질 기회가 없겠네요?"

  "아니야. 네가 품은 좋은 뜻이 누구한테로 가서 좀더 퍼질 수 있다면 너도 누구보다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어,

이를테면 승태가 너를 보고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든지 하면……."

  제비풀을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일어날 만남이 자신에게는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가졌습니다. 햇볕을 좀더 받기 위해 비굴하게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고, 팬지꽃이 예쁘다고 아양을 떨지도 않았습니다.

  선인장이 가르쳐 준 아름다움만 생각하였습니다. 좋은 뜻을 가지려는, 그리고 좋은 것을 보려는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비와 바람을 맞

아들였습니다. 5월이 되었습니다.

  화분들이 모여 있는 베란다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여졌습니다. 승태가 앓아 눕게 되어서 집안 식구들의 마음이

그 쪽으로만 쏠렸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얼굴에 열꽃이 핀 승태의 곁에 붙어 앉아 '힘을 내 승태야,

힘을 내'하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눈길을 돌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물을 얻어먹지 못한 꽃들은 하나하나 시들어 갔습니다. 팬지꽃, 제라늄, 튤립. 온실에서 자란 꽃나무들이

먼저 시들었습니다.

 오직 제비풀 하나만이 꼿꼿하게 참고 견뎌 냈습니다. 아니 견디는 것뿐만이 아니고 별 같은 꽃봉오리까지 부풀렸습니다.

그것은 벌이 꽃에서 꿀을 따듯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리고 맑은 비와 상큼한 바람 속에서 제비풀이 따들인 사랑의 모임이었습니다.

  드디어 제비풀한테서 꽃이 마악 피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창가에 누운 승태의 눈길이 제비꽃 언저리에 가 닿았습니다.

  "그래 나도 참고 이겨 낼 태다."

  승태가 제비꽃을 보고 말했습니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승태 아빠가 앓고 있는 승태에게 물었습니다.

  "저기, 저 꽃을 보고 한 다짐이에요."

  "꽃이라니 무슨 꽃 말이냐? 팬지도 제라늄도 시들어 버렸는데…… ."

  "팬지 화분 귀퉁이에 별같이 작은 꽃이 있잖아요?"

  "오오! 정말…… 정말 아름다운 꽃이구나."

   승태 아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비꽃이 피어 있는 화분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들어 승태의 머리맡에 놓았습니다.

  승태의 두 눈 속에는 제비꽃이, 제비꽃 가장자리에는는 승태의 눈이, 빛이 되어 반짝반짝 빛을 튀기며 만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