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류 시화 - 여행자를 위한 서시, 구월의 이들, 배낭으로 부터 배워야 할 것,

opal* 2010. 9. 20. 21:17

 

 

여행자를 위한 서시

 

                                                    류 시화

 

날이 밝았으니 이제 길을 떠나야하리.
시간은 과거의 상념 속으로 사라지고
영원의 틈새를 바라본 새처럼 그대 길 떠나야 하리.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냥 저 세상 밖으로 걸어가리라.
한때는 불꽃같은 삶과 바람 같은 죽음을 원했으니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아직 잠들지 않은 별 하나가 그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그대는 잠이 덜 깬 나무들 밑을 지나
지금 막 눈을 뜬 어린 뱀처럼 홀로 미명 속을 헤쳐 가야 하리.
이제 삶의 몽상을 끝낼 시간
날이 밝았으니, 불면의 베개를 머리맡에서 빼내야 하리.
오, 아침이여, 거짓에 잠든 세상 등뒤로 하고
깃발 펄럭이는 영원의 땅으로 홀로 길 떠나는 아침이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자
혹은 충분히 사랑하기 위해 길 떠나는 자는 행복하여라.
그대의 영혼은 아직 투명하고
사랑함으로써 그것 때문에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리.
그대가 살아온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니
이제 자기의 문에 이르기 위해 그대는
수많은 열리지 않는 문들을 두드려야 하리.
자기 자신과 만나기 위해 모든 이정표에게 길을 물어야 하리.
길은 또 다른 길을 가리키고
세상의 나무 밑이 그대의 여인숙이 되리라.
별들이 구멍 뚫린 담요 속으로 그대를 들여 다 보리라.
그대는 잠들고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꿈을 꾸리라.

 


 구월의 이들

 

                                                 류 시화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 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 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 다른 길이 있어 한 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먼 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 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 온다해도 나는
소나무 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배낭으로 부터 배워야 할 것

 

                                               류 시화

 

뉴델리에서 북부 펀잡 지방의 아므리차르로 가는 여덟 시간 거리의 2등칸 기차안에서

나는 자이나교 출신의 한 노인과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문득 노인은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 현상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것들로부터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람으로부터는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하고,

강으로부터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감을 배워야 하며

인간이 만든 기차로부터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간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신발로 부터는 무엇을 배워야 하죠?"
그가 말했다.
"어떤 어리석은 자가 쓸데없는 걸 발명하면 그것이 얼마 안 가서 전세계에 퍼져 버린다는 걸 배울 수가 있지."
그것도 그럴 듯해 보여서 나는 다른 걸 물었다.
"그럼 내가 들고 있는 이 배낭으로부터는요?"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안에 먹을 것이 들어 있으면 앞에 앉은 사람과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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