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문화,여행)

2010년 9월 마지막날을 경복궁에서

opal* 2010. 9. 30. 23:00

 

만나는 상대에 따라 습관화 된 걸까? 스스럼이 없는 막역한 사이라 그럴까?

'오늘 스케쥴은?" 아침에 일정을 묻는 문자가 와 오후에 만나자는 번개팅으로 결말이 났다.

"학생들 시험기간인데 오전에 일이 있어 감독에서 일부러 빼 달라고 했다" 며 날자에 무슨 큰 의미라도 두듯

9월의 마지막 날을 강조하며 만나고 싶다기에 시간내어 시내에서 만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기에 여러가지 재료가 듬뿍 담긴 영양 돌솥밥으로 식사부터 하였다. 

경복궁은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라 답사의 의미 보다는 잠시 틈을 내어 시간 보내기는 고궁만한 곳도 드물다.

 

 새로 복원한 경복궁 광화문(景福宮 光化門 - '왕의 큰 덕(德)이 온나라를 비춘다'는 의미), 경복궁의 남쪽에 위치한 정문 이다.

1395년 (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 도전에 의헤 사정문(四正門)으로 지어졌으나,  1425년 (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는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다, 천정에는 주작 그림이 그려져 있다.

2층 누각인 광화문 앞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있다.

 

광화문(光化門)은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어 270 여년 간 중건되지 못하던 것을 1864년 (고종 1)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한일 합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 시켰고, 한국 전쟁 때 다시 소실 되었다.

1969년 박 정희 시절 원래와 다른 위치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 복원되었다, 지붕이 돔으로 되었던 것을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2010년 8월에 완료, 제 65주년 광복절에 맞춰 일반인에게 공개 되었으니 한 달 전의 일.이다.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이 있어 잠시 구경도,

서울 시내  각 고궁의 수문장 교대식 중 경복궁 한 곳만 문화재청의 위탁을 받아 한국 문화재 보호재단이 주관하고,  

서울시가 주관하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6년에 첫선을 보이며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경복궁을 제외한 고궁들은 공익근무요원이 재연하다 2007년 부터 비정규직 근로자인 이벤트 회사 직원들이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해태상과 수문장 교대식.

 

 

수문장 교대식 구경하던 외국인들 틈에 끼어 안으로 입궁. 광화문을 들어서면 흥례문이 있고 그 뒤 근정문 안으로 근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광화문과 근정문(근정전 정문) 사이의 중간 문인 흥례문(興禮門)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안에서 내다본 광화문.

 

근정정 정문인 근정문(勤正門) 보물 제 812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식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도로 되어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 두었고, 관리들이 궁에 출입 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근정문 뒤로 청와대와 경복궁을 품고 있는 북악산이 보인다.

큰 아들 2년 동안의 군대 시절은 경복궁 내에서 2주, 북악산에서 2주씩 근무를 하였다. 규칙적으로 2주일에 한 번씩

산에서 내려오는 토요일엔 점심밥을 넉넉히 준비하여 온 식구가 경복궁내에서 면회하며 다른 장병들과 같이 식사를 나누기도 했었다.

 

근정전(勤政殿)의 정문인 근정문(勤政門)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 조선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 등을 거행하던 곳 이다.

1395년(태조 4)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고종 4) 11월에 흥선대원군이 중건() 하였다.

다포양식()으로 현존하는 전각 중 가장 오래된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이성석축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기단의 4면은 석란()으로 둘려지고, 전후좌우면에는 쌍봉운무늬[]를 조각한 돌계단이 있어

화강암판을 깐 뜰과 연결되며, 정원 좌우에는 정1품 이하의 품석()을 세웠다.

 

두공(栱)은 상·하층이 외삼출목(), 내사출목()이며

내출목에서는 수설()이나 앙설()이 구름무늬처럼 새겨진 운궁()으로 되었고,

살미[] 표면의 초화각무늬[]나 단청()·금색쌍룡()과 조화되어 화려한 장식적 효과를 낸다.

 조선 말기 건축의 정수라 할 수 있고, 당시 건축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표본적 건물이다. 

 

근정전 - 국보 제223호. 경복궁의 정전으로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었던 곳이다.

 

근정전 내부와 일월곤륜도(日月崑崙圖)

건물 내부에는 10개의 높은 기둥을 정면으로 4개, 측면으로 3개씩을 세워 천장을 받들게 함과 동시에 궁전 안을

중앙부의 내진()과 주위를 도는 외진()으로 구분하는 역할을 겸하게 했다.

중앙간 북쪽 후면에 방형()의 보좌()를 두고, 그 단상에 어좌()와

그 뒤에 오악일월()을 그린 병장()을 세우고, 그 위에 화려한 보개()를 달았다.

 

일월도() - 일월오봉산도(), 일월오악도()라고도 한다.

비교적 큰 규모로 궁궐 어좌 뒤, 임금의 초상인 어진()을 모신 진전(殿)이나 혼전(殿) 등에도 비치되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다섯 개의 봉우리와 그 아래 소나무, 폭포, 파도, 상단 좌우에 해와 달을 배치시킨 좌우균형을 갖춘 그림이다. 

임금은 천명을 받아 삼라만상을 통치함을 나타내며, 하늘의 보살핌으로 자손만대로 왕실과 나라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현존하는 것으로는 창덕궁 인정전(殿), 창경궁 명정전(殿), 경복궁 근정전(殿), 덕수궁 중화전(殿)의 그림들이 대표적이다.

 

 

사정전(思政殿)- 경복궁의 편전으로 왕이 평소에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는 곳.

 

 

 

경복궁 강녕전(景福宮, 康寧殿 ) - 왕의 침전(寢殿)내외 종친을 불러 연회를 하는 곳이며 또한 왕이 신하를 불러 은밀히 정사를 논의하던 곳.

 

왕이 일상 거처하던 전각(殿)으로,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이 건물 이름을 지었다.

강녕은 오복()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1553년(명종 8)에 불에 타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고,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그 후 1920년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에 불 타 없어진 창덕궁() 내전(殿)을 다시 짓는다는 구실로 일본인들이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12개동 794평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건물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지위가 가장 높은 왕이 거쳐하는 건물이라 왕보다 더 이상 높은 지위는 없다는 뜻 이다. 

 

 

 

견학 나온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선생님 옆에서 잠시 귀동냥을 하기도 했다.

 

경복궁 교태전(景福宮交泰殿) - 왕비의 침전, 조선 태조가 건국한 지 3년 후인 1394년에 창건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후 1555년(명종 I0) 8월에 다시 지었으나 이것 역시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69년(고종 6)에 새로 지은 것이다. 강녕전과 함께 이 건물 역시 용마루가 없다.

군주가 있는 근정전 이상의 더 높은 건물은 용마루를 없앴다. 군주의 위엄믈 돋보이게 한 것이다.

 

교태전 마루.

 

경복궁 아미산(景福宮 峨嵋山) 굴뚝( 1985.1.8. 보물 제811호 지정) - 경복궁 안의 침전(寢殿)인 교태전(交泰殿) 구들에 연결되었던 굴뚝.

경회루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왕비의 침전으로 뒤쪽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이 있는데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산의 이름을 빌어 '아미산'이라고 한다.

 

교태전 실내와 후원 한 쪽에 배치한 괴석. 예전 우리나라의 조경 양식은 후원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의 구조물인 아미산 굴뚝.

높이(지붕 제외)는 260cm, 한 면(모두 6면)의 폭 88cm이다. 이 굴뚝은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석조물과 더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크다.

화강석 기단 위에 벽돌을 6각형으로 30∼31단씩 쌓았으며, 상부는 창방, 소로(접시받침), 굴도리 모양의 부재로 축조하였다.

6각의 각 면에는 사군자, ·십장생, 자무늬·, 봉황, 귀면(), 당초문() 등으로 네 가지의 무늬를 구성하였다.

 

경복궁 후원을 감상하는 외국인 관광객.

쪽문과 꽃담 위로 기와지붕 끝 5개의 잡상(雜狀 -악귀를 쫒는다는 의미의 장식 기와)도 보인다.

잡상은 주술적 의미를 지니므로 홀수로 구성되며 마지막 형상은 세지 않는다.

 

우물터.

 

경복궁내에서 서쪽으로 조망되는 인왕산. 경복궁 우측(서쪽)으로 사직단이 있고, 사직단 우측으로 인왕산이 있다.

 

경복궁 북쪽의 정문인 신무문은 뒤로 보이는 북악산과 연결이 된다. (동쪽 건춘문, 서쪽 영춘문, 남쪽 광화문)

 

 

 

풍기대.

 

향원정 뜰을 거니는 임금과 왕비를 재현하고 있다.

 

 

향원정 연못.

 

경복궁 향원정(景福宮 香遠亭)과 취향교.-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지었다.

 

2층 규모의 익공식()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 2층을 한 나무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을 놓았다.

공포는 내외일출목()이며, 일출목의 행공첨차에 소로[]를 두었고, 외목도리() 밑에 장설()을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지붕에 별다른 장식은 없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집옥재는 협길당, 팔우정과 더불어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로 건축 양식은 중국 양식이며,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경회루로 들어가는 대문 틈으로 들여다 본 경회루 1층 천정 모습.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 하였다.

 

경복궁 내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의 접대나 연회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경회루 연못 안에 인공섬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궁궐 회랑.

 

석양에 물들어 조형미가 돋보이는 근정전 서쪽면 모습.

이층으로 된 석축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5칸(30m), 측면 5칸(21m)의 중층 팔작지붕의 큰 직사각형 건물이다.

기와지붕 끝엔 7개의 잡상(雜狀)이 보인다.

잡상(雜狀 -악귀를 쫒는다는 의미의 장식 기와)은 주술적 의미를 지니므로 홀수로 구성된다. 

자선당의 잡상은 9개, 경회루 지붕에는 11개의 잡상이 있는데 숫자가 차이나는 것은 기와지붕 크기의 차이에 근거를 둔듯하다.  

 

근정정과 근정문.

 

썰물 빠지듯 관광객들이 다 돌아간 후의 조용한 경복궁 뜨락. 밖이 내다보이던 광화문이 해가 기우니 굳게 닫혔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에 있는 경복궁(사적 117호, 1963.1.21 지정)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 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 있는 건물은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천추전, 수정전, 자경젼, 경회루, 재수각, 숙향당, 함화당, 향원정, 집옥재, 선원정 등 이다.

 천추전 - 편전일곽의 서편전에 해당하는 천추전은 고종 2년(1865년)에 중건한 건물로 신하들과 회의를 하던 곳이다.

  수정전 - 세종대왕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다시 지은 건물로 고종 초기에는 침전으로 사용되고

편전의 역할을 하였으며 갑오개혁 시절에는 국군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자경전 -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가 되었던 조대비(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뒤에는 십장생과 박쥐문, 당초문을 새긴 굴뚝인 십장생 굴뚝이 있다.

 건청궁 - 고종 10년(1873년)에 왕과 왕비가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면서 거쳐할 목적으로 지었다.

고종은 이 곳을 좋아하여 왕비와 함께 자주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원전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을 모시던 건물로 후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자선당 - 자선당과 비현각은 동궁의 주 전각이다.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으로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경복궁 안의 여기 저기를 둘러본 후 기우는 해 따라 밖으로 나왔다. 

반쪽짜리 하루를 마감하는 9월의 마지막날을 행복해하며 오늘도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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