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문화,여행)

답사) 공주 송산리 고분(公州 宋山里 古墳), 무령왕릉(武寧王陵)

opal* 2011. 2. 19. 23:00

 

기차를 이용하는데 예약을 안했더니 자리가 여기 하나, 저기 하나,

작년 여름(2010.8.20.)에 경춘선 기차를 이용할 땐 같은 칸 통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기라도 했는데 이번엔 아예 칸 마저 다르다.ㅋㅋ

짝꿍과 같이 앉을까하여 혹시나 하며 옆 자리에 혼자 앉은 아가씨에게 부탁해보니 단호하게 거절을 한다.

창가 자리라 일어서기가 싫단다. 내 자리도 창가이기는 마찬가지 인데...  수원역에서 한 번 쉬고 바로 평택 역에 도착 한다.

 

평택에서 승용차로 공주까지 이동.

 

 

금강의 파란물이 흐르는 옆으로 뜰과 실내가 넓은 기와집에서 이런 저런 얘기 나누며 맛있는 음식으로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공주 시내를 잠깐 통과하여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유적지 도착.

 

 

여러 무덤 안의 모양을 실제 고분 처럼 재현해 놓은 모형관.

무령왕릉송산리 고분군 내에 모형 전시관으로 만들어져 발굴 당시의 모습과 고분의 구조를 볼 수 있도록 했으며,

유물은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전시되어 있다. 현재 무령왕릉을 포함한 송산리 고분군은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5호분 벽면의 벽화. 

 

 

6호분 안의 청룡, 백호, 현무, 주작 사신도.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무덤이다. 무덤의 재료나 구조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였던 전실묘(塼室墓)와 동일하다.

무덤에 축조된 벽돌에 중국 남조의 양나라 양식을 본받았음을 밝히는 글귀가 있어 백제와 중국의 교류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가 회(灰)로 벽에 그려져 있다.

부여 능산리 벽화분과 더불어 현재까지 알려진 백제 벽화고분 2기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는 많이 훼손되어 알아 보기 어렵다.

 

6호분 벽면

 

 

무령왕릉 왕금관식(武寧王陵王金冠飾). 금귀걸이 금제뒤꽂이, 1쌍, 높이 각각 30.7㎝, 29.2㎝, 너비 각각 14㎝, 13.6㎝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관꾸미개. 국보 154호.(1974년 7월9일 지정), 국립 공주 박물관 소장.

1971년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무령왕릉 발견 조사시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 되었다

 

무령왕릉 왕비금관식(武寧王陵王妃金冠飾)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관꾸미개. 국보 155호.

 

 

 

무덤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많은 수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유물들은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절대 연대가 확인된 유물은 이후 삼국시대 문화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귀걸이를 비롯한 금속 공예품들의 정교한 제작 기술을 통해 백제 미술의 발달된 수준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무령왕릉(武寧王陵)의 벽면과 바닥 -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 되었다.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를 접하고 있다. 분구()는 지름 약 20m의 원형()으로

널방[]의 바닥면에서 분정()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문자전()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형성하고 바닥면으로 부터 제일높은 곳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과

그 아래에 연자창()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 석수(), 청자육이호() 동제()의 발()·시(

오주전()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 2장이 나왔다.

널방[]에는 청자사이병()· 청동용기류()· 철모(鉾)· 현금() 등의 껴묻거리[]와

 금·은의 식금구()가 달린 흑칠()이 칠해진 목관()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에 매치()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 족좌()· 동경()· 단룡환두()의 칼, 울두(熨)와 동제()의 용기류 화염형관식()·수식()·이식()·과대(銙)·식리()·팔찌[] 등의 꾸미개[]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가 출토되었다.

 

연화문, 사격자문, 인동문 등 무늬를 넣어 만든 벽돌로 축조한 무령왕릉 안의 벽면. 

 

무령왕(武寧王) -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

이름은 사마(斯摩)·융(隆), 시호는 무령(武寧),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으로 

 501년 백가(苩)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은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에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벌하였다.

전() 왕인 동성왕은 신진세력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다 비대해진 신진세력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구귀족 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한 상태에서, 금강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민을 정착시키고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여 조세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즉위하던 해인 501년에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507년에는 말갈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령성()을 쌓았다. 512년 중국 양()나라에 조공()하였으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가불()·원산()의 두 성을 빼앗겼다.

521년 양나라의 무제()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에 책봉하였다.

523년 인우()·사오()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의 장정을 동원시켜 쌍현성()을 쌓았다.


무령왕의 평상복과 무령왕릉 내부.

 

↑↓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을 적은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삼국시대 유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가 되었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

백제고분이 대부분 도굴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완전하게 원형을 유지한 채 발견된 점도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고분군 약도.

 

무령왕릉은 남사면의 지맥 말단부에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가운데 뒷면에 자리한다.

3기의 고분 가운데 무령왕릉이 최북단에 있고, 여기서 남쪽으로 9~10m 간격을 두고 6호분이 자리하며,

5호분은 여기서 동쪽으로 10m의 거리를 두고 있어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무령왕릉(武寧王陵)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년)과 왕비가 합장된 능이다.

연도 입구에 놓인 지석(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하여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으며,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다. 왕릉은 왕이 죽기 11년 전인 512년에 이미 축조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1971년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어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령왕릉은 전축분이라는 중국 남조 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해

당시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전개한 백제 사회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무령왕릉 앞에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 고분군에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능.

 

 

 

 

 

 

 

 

 

↓↑

 ↓↑

↑ 무령왕릉 앞에서 조망되는 공산성.

 

↓↑

↑ 정지산 유적지 가는 길.

 

 

무령왕릉이 위치한 공주 송산리(公州 宋山里) 고분군.

 공주시 중심부에서 서북방으로 약 1㎞ 떨어진 지점인 금성동웅진동에 연접한 송산리에 위치한다.

고분군은 송산의 동남쪽 8부 능선상 해발 75m 정도,  서쪽으로는 곰나루가 있는 금강이 아늑하게 감싸 돌고, 동쪽에는 공산성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전곡리 선사유적지(全谷里先史遺蹟址)에 봉분도 없이 묻히신 김 ㅇㅇ 교수님,

무령왕릉을 발굴하며 "발굴당시 유물에 공기가 접촉되니 금방 색이 파랗게 변하더라" 라는 말씀과

"살아 생전에 무령왕릉을 발굴한 일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하셨다는 말을 90년대 초 다른 교수님의 강의 중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대통령께서 발굴을 지시했다고 했었다. 

 

국립 공주 박물관에도 들려 골고루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다음 기회로 미룬다.

박물관에 있는 알멩이를 못보았으니 비록 수박 겉핥기 식으로 둘러 보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 숙원 하나가 풀린듯 하다.

 

1099

'Story(문화,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가대교(巨加大橋)  (0) 2011.03.22
영화) Black Swan  (0) 2011.03.03
영화) 하비의 마지막 로멘스(Last Chance Harvey)  (0) 2011.01.21
영화 관람 후 고궁 번개팅  (0) 2011.01.21
영화) 클라라  (0) 201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