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서 정주 - 꽃, 상리과원, 나의 시

opal* 2012. 4. 19. 21:00

 

 

 

                                                  서 정주

 

꽃 옆에 가까이 가는 아이들이 있으면 , 할머니들은
「얘야 눈 아피 날라. 가까이 오지 마라.」고 늘 타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질마재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피어나는 山과 들의 꽃들을 이쁘다고 꺾기는커녕, 그 옆에 가까이는 서지도 않고,

그저 다만 먼 발치서 두고 아스라히 아스라히만 이뻐해 왔읍니다.
그러나, 꼭 한 가지 例外가 있긴 있었습니다. 그것은 딴 게 아니라, 누구거나 즈이집 송아지를 이뻐하는 사람이,

그 송아지가 스물 넉 달쯤을 자라서 이제 막 밭을 서먹서먹 갈 만큼 되었을 때, 그때가 바로 진달래꽃 때쯤이어서,

그새 뿌사리의 두 새로 자란 뿔 사이에 진달래꽃 몇송이를 매달아 두는 일입니다.
소 - 그것도 스물 넉 달쯤 자란 새 뿌사리 소만은 눈 아피도 모른다해서 그리 해 온 것이었어요.

 

 

 

 

상리과원(上理果園)

 

                                                                                     서 정주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漢江水)나 낙동강(洛東江) 상류와도 같은 융융(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굴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트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숭어리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꾀꼬리새끼들이 조석(朝夕)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 만 마리의 꿀벌들이 왼종일 북치고 소고치고 마짓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當然)한 일이다.

 

우리가 이것들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묻혀서 누워 있는 못물과 같이 저 아래 저것들을 비취고 누워서, 때로 가냘프게도 떨어져 내리는 저 어린것들의 꽃잎사귀들을

우리 몸 위에 받아라도 볼 것인가. 아니면 머언 산(山)들과 나란히 마주 서서,

이것들의 아침의 유두 분면(油頭粉面)과, 한낮의 춤과, 황혼의 어둠 속에 이것들이 잦아들어 돌아오는 아스라한 침잠(沈潛)이나 지킬 것인가.

 

하여간 이 하나도 서러울 것이 없는 것들 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미물(微物)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섣불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축복(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 것, 비비새의 어느 것, 벌 나비의 어느 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

이것들의 초밤에의 완전 귀소(完全歸巢)가 끝난 뒤, 어둠이 우리와 우리 어린것들과 산과 냇물을 까마득히 덮을 때가 되거든,

우리는 차라리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가리켜 보일 일이요, 제일 오래인 종(鐘)소리를 들릴 일이다.

                                                                                                                      상리과원- 상리(마을이름)에 있는 과수원

                                                                                                                  융융한-물의 양이 많고 높게 가득히 흐르는 모양

                                                                                                                       유두분면-기름바른 머리와 분을 바른 얼굴

 

 

 

나의 시

 

                                                        서 정주

 

어느 해 봄이던가, 머언 옛날입니다.
나는 어느 親戚의 부인을 모시고 城안 冬柏꽃나무 그늘에 와 있었읍니다.
부인은 그 호화로운 꽃들을 피운 하늘의 部分이 어딘가를 아시기나 하는듯이 앉어계시고,

나는 풀밭위에 흥근한 落花가 안씨러워 줏어모아서는 부인의 펼쳐든 치마폭에 갖다놓았습니다.
쉬임없이 그짓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뒤 나는 年年히 서정시를 썼습니다만 그것은 모두가 그때 그 꽃들을 주서다가 디리던---그 마음과 별로 다름이 없었읍니다.

그러나 인제 웬일인지 나는 이것을 받어줄 이가 땅위엔 아무도 없음을 봅니다.
내가 줏어모은 꽃들은 제절로 내손에서 땅우에 떨어져 구을르고 또 그런 마음으로밖에는 나는 내 시를 쓸 수가 없읍니다
                                                                                                                     (서정주시전집 1』, 민음사, 1991.)

 

 

1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