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마종기- 눈오는 날의 미사, 겨울 기도, 길목에 서있는 바람, 창경궁 편지

opal* 2014. 12. 18. 00:57


눈오는 날의 미사

마 종기

하늘에 사는 흰 옷 입은 하느님과
그 아들의 순한 입김과
내게는 아직도 느껴지다 말다 하는
하느님의 혼까지 함께 섞여서
겨울 아침 한정 없이 눈이 되어 내린다

그 눈송이 받아 입술을 적신다
가장 아름다운 모형의 물이
오래 비어 있던 나를 채운다
사방을 에워싸는 하느님의 문신
땅에까지 내려오는 겸손한 무너짐
눈 내리는 아침은 희고 따뜻하다


겨울 기도

마 종기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하소서


길목에 서있는 바람

마 종기

한 세월 멀리 겉돌다 돌아와 보니
너는 떠날 때 손 흔들던 그 바람이었구나
새벽 두 시도 대낮같이 밝은
쓸쓸한 북해와 노르웨이가 만나는 곳
오가는 사람도 없어 잠들어가는
작고 늙은 땅에 손금처럼 남아
기울어진 나그네 되어 서 있는 길목들
떠나버린 줄만 알았던 네가 일어나
가벼운 몸으로 손을 잡을 줄이야

바람은 흐느끼는 부활인가 추억인가
떠돌며 힘들게 살아온 탓인지
아침이 되어서야 이슬에 젖는 바람의 잎
무모한 생애의 고장난 신호등이
나이도 잊은 채 목 쉰 노래를 부른다
두고 온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바람이 늘 흐느낀다는 마을
이 길목에 와서야 겨우 알겠다



창경궁 편지

마 종기

지난 가을 나흘동안 일시 귀국을 했었습니다
산소에도 못가고 햇살 넓은 금요일 아침
40년 만에 정문으로 창경궁에 들어갔었습니다

입장권 700원. 오랜만에 혼자서 걸었습니다.
가슴 메게 아버님, 당신이 보고 싶었습니다.
정성들여 세우신 그 어린이헌장비를 찾아서
식물원 쪽을 뒤지다가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지난 세월은 너무 긴 시간이라 풀숲에 덮이고
죄송하고 암담해서 어깨 늘어뜨리고 걷는데
산수유, 느릅나무, 말채나무, 산사나무, 황벽나무,
귀룽나무, 때죽나무, 미선나무, 자작나무, 서어나무......
비슷하게 생긴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줄 서서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하데요.

배고팠던 한국전쟁 중에는 버찌를 따 먹으러
저기 창경원 담을 매일 내 집같이 넘나들었지요.
이 나무숲에는 인민군 고사포 부대가 있었구요.
기억력 좋은 나무들이 금방 나를 알아보더군요.
흐뭇하게 어린 몸이 되어 걸어나오는 반대편
한 떼거리 유니폼 입은 어린이들이 오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일, 이학년쯤일까, 선생님을 따라서
무슨 노래를 신나게 합창하는 여울 고운 물,
보셔요. 아름이, 상진이, 누리, 우경이, 또
시내, 은혜, 보람이, 진우와 희원이, 상민이......

아버님 그 안에서 문득 당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공기같이, 물방울같이 밝게 떠올랐습니다.
거기 계셨군요. 이 근처 어디 계시리라 믿었지요.

당신은 살아서 맑은 어린이들 눈동자에 계시고
어린이헌장비는 창경궁 어디에나 다 있었습니다.
오래 찾아뵙지 못해도 외로워하지 않으신
아버님, 여전히 단정하신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시집<<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문학과지성사, 2002))



▶ 시인 마종기(1939~ )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의사이며 시인이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방사선과 의사로 오래 일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뒤 꾸준히 시집을 펴냈다. 시집으로 『조용한 개선』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 등이 있다.
마 해송의 아들이다. <마해송(馬海松, 1905.1.8 ~1966.11.6)은 어린이 운동가, 아동문화운동가, 아동문학가, 동화 작가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