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오세영- 5월, 봄날에, 진달래꽃, 사계첩운(四季疊韻)

opal* 2016. 5. 5. 23:28

 

5월

 

                                                            오세영

 

어떻게 하라는 말씀 입니까

부신 초록으로 두 눈 머는데
진한 향기로 숨 막히는데
마약처럼 황홀하게 타오르는
육신을 붙들고
나는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아, 살아 있는 것도 죄스러운
푸르디 푸른 이 봄날,


그리움에 지친 장미는 끝내
가시를 품었습니다.
먼 하늘가에 서서 당신은
자꾸만 손짓을 하고

 

 

봄날에

 

                                                                          오세영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봄이 오면
잎새 피어난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잎새 피면
그늘을 드리운다는 것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 너를 만남으로써
슬픔을 알았노라.
전신에 번지는 이 초록의 그리움을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의 그
꽃 그늘을

 

 

진달래꽃

 

                                                            오세영

 

입술은 타고 몸은 떨리고

땀에 흔곤히 젖은 이마


기다림도 지치면
병이 되는가  
몸살 앓는 봄밤은 길기만 하다

기진타가 문득 정신이 들면
먼 산 계곡의 눈 녹는 소리
스무 살 처녀는 귀가 여린데

어지러워라
눈부신 이 아침의 봄멀미

밤새 地熱에 들뜬 山은
지천으로
열꽃을 피우고 있다  

 

진달래

 

 

사계첩운(四季疊韻)

 

                                                     오세영

 


꿈결인 듯 어려오는 향기에 문득 깨어
겨우내 닫힌 창을 반 남아 열어보니
이 아침 홍매화 꽃잎이 수줍은 듯 벙글다.



푸르고 푸르러도 이보다 푸르리오
청산(靑山)은 사파이어, 녹수(綠水)는 비취로다.
여름은 눈으로 온다. 햇빛 반짝 자수정


연화등(蓮花燈) 등피 아래 편지를 쓰는 한밤
문득 들려오는 가을의 노크 소리
붓 놓고 방문을 열자 마루 위의 오동잎


문갑 위 홀로 놓인 한란(寒蘭)이 추어뵈다
떠는 한란 외로두고 내가 옷을 갈아 입다.
문열고 내자(內子) 찾느니 칼 바람이 매섭다.

향기로 오는 봄, 색깔로 오는 여름
소리로 오는 가을, 촉감으로 오는 겨울
이 모두 부질 없어라. 마음으로 오는 님

 

 

1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