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떡집
김시언
기와집 처마밑에 호박고지가 내걸렸다.
바닷바람과 햇살을 받아 꾸덕꾸덕해지면
찹쌀가루 뿌려 호박범벅을
해 먹을 요량이란다
눈보라가 길을 뚝 끊은 어느 날,
입이 심심할 때 떼어먹으면 얼마나 달까
어쩌다 내가 바닷가 마을을 다시 찾아올 때
그 날이 떡쪄먹는 날이면 좋겠다
빙 둘러앉은 섬들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고슬고슬 눈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거기에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얹으면
햇살과 바람과 나무도,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쪼아먹던 새도,
서쪽바다 파도도 흠흠 기침을 할 것이다
손가락에 찐득하게 들러붙은 떡을 떼어먹다가
문득 창 밖을 바라보았을 때
눈가루 뿌옇게 흩날리면
켜켜이 물결지는 바닷가를 걸어도 볼 일
눈이 펑펑 쏟아질 거라는 일기예보가 나오면
지체없이 그 집으로 떠날 참이다
반지하 등고선
김시언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산정이 있다
침침한 지하 속을 걸어 오르는 산,
지층과 지층 사이
반지하 쪽방 곰팡이 핀 벽지를 뜯어낸다
벽지 속에 첩첩이 덧대어 껴입은 벽지들
층층이 등고선 무늬를 이루었다
어느 바위에서 떨어졌을까
모래알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벽지 틈
비를 머금은 구름이라도 지나가는지
이불을 덮고 뒤척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손바닥만 한 창을 비집고 드는 햇살을 따라
따글따글 끓어오르는 먼지들,
반층 눈높이로 보는 하늘은 반층 더 높아서
무릎을 꺾어펴는 계단마다 등고선 주름들이 굽이친다
모란꽃을 뜯어내면 아메바가 나오고
아메바를 뜯어내면 푸른 하늘이,
아이들 찡그린 낙서들을 품고 있다
매미유충처럼 벗고 싶은 허물들
꽃무늬 포인트벽지 한 장으로 다시 등고선을 그린다
무늬가 촘촘할수록 가파르고 거친 산
방이 벼랑을 품고 융기한다
밥 짓는 꽃
김시언
해가 지기 시작하면 꽃에서 쌀독 긁는 소리가 난다
따그락따그락 빈 도시락통 울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
담장 너머 고개를 내밀고 빈 속 달래는 아이들
마당에 있던 할머니가 밥 지으라 이르고 어머니가 쌀 씻는 그릇을 집어든다
우물가 바닥에 양은그릇이 하나둘, 두레박이 기울면
쏴 뒷산 너머 노을이 깔린다
날이 저물어야 피는 꽃
저문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분꽃
강아지랑 단둘이 사는 할머니네서 국수내기 민화투를 치다가,
전화 한 통 없는 며느리 생각을 잠깐 하다가,
분꽃이 필 때야 하면서 끙하니 일어서는 저녁
자꾸 보채는 꽃 속에서 밥 끓는 소리가
. 우리동네 사알짝 첫눈 내리고
광화문 앞 광장에선 3차 촛불 밝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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