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trekking

해파랑길 32구간(삼척)

opal* 2019. 4. 14. 22:30


유채꽃 만발한 계절에 맞춰 삼척 구간 선택.


신청자가 많아 대기자까지 있던 해파랑길 트레킹, 전국적으로 비 오겠다는 예보로 좌석 몇 자리를 비운 채 출발 4시간 만에 추암공원 도착.  


추암공원 입구.


90년대 초반 일출 사진 찍으러 왔었고, 3년 후  2박3일 동해안 여행 중 혼자 새벽에 사진 찍으러 왔던 곳.

 어느핸가 두타산 산행날, 산행 전날 금식 후 병원 다녀오느라 두타산 정상엘 못가고, 2진으로 추암공원에 왔다가

무릉계곡 용추폭포까지 다녀온 일이 며칠 전 같이 기억이 생생한데 생각해보니 십년 세월이 훌쩍 지났다. 

애들 어렸을 적에 맹방 해수욕장엘 왔었고, 두 번째 울릉도 여행 땐 묵호항에서 배를 탔었다.  

1960년대에 처음 발 딛었던 북평 해수욕장은 1980년도 동해시로 바뀌며 북평해수욕장이란 이름조차 없어졌다. 


추암공원.


출렁다리를 만들며 만든 데크길은  공사 중이라 아직 걸을 수가 없다.











아직 공사중인 출렁다리는 길이가 길지는 않다.


출렁다리 배경.



추암 촛대 바위.  전에 TV 프로그램 시작과 끝 부분 애국가 나올 때 동해안 일출 장면에 나오던 곳이다. 


촛대바위 배경.





추암해변.



이사부 사자공원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 오르내리기 싫어 본인은 생략하고 해안길 직진.





삼척 쏠비치. 양양솔비치는 이용해봤는데 이곳은 아직...




삼척해변 도착.



삼척해변에서.



후진항을 지나고.






삼척비치 조각공원.






작은바다라는 상호를 보니 작가는 모르겠고 어디서 본 글이 떠오른다.  


작은 바다

모든 바다는 특별하다.
낮은 산은 있으되 작은 바다는 없다.
바다는 늘 넓은 가슴으로 사람들에게 요람이 되어 주었다.

바다가 더욱 아름다운 계절,
길을 나서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찬란하고도 따뜻한 햇살 아래서 은비늘 곱게 빛내는 푸른 바다.
세상의 계절은 같아도 나의 봄은 같을 수 없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 다섯 가지 중,
가장 우선순위는 배낭을 꾸리는 것.

조금 이르다 해도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그고
이 계절도 힘껏 맞이할 것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다시 돌아가는 날,
한동안은 바다를 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바다가 그리워질 때까지 흘린 땀방울,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소망의 종이 있는 공원 길 건너편 소망정에서 넷이서 점심 식사.


새천년 해안 유원지.


소망의 종.



이사부 해변쉼터에서 선두팀 일행들의 점심식사.






죽서루를 찾기위해 해변과 헤어져 삼척시내로 들어섰다.





길 옆으로 오십천이 흐르고, 멀리 삼척교가 보인다.


삼척교앞 사거리.



오십천 옆으로 가꾸어 만든 장미공원.


벚꽃은 이미 다 지고 장미는 철이 일러 아직 피지 않았고,




삼척교 앞을 지나듯 오십천교도 건너지 않고 지나친다.




삼척에서 자전거 대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죽서루 안내판. 죽서루 정자 외에도 암각화와 용문바위, 송강 가사터가 있다.



삼척 죽서루(三陟竹西樓,  보물 제213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에 위치.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세워진 관동팔경 중 한 곳이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고,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죽서루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후반에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후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金孝孫)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크기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지만, 본래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좌우 각 1칸에 놓인 공포(栱包)의 모습이 다르고,
또 내부 천장에 당초 측면 밖으로 나와 있던 도리의 뺄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기둥 윗몸에서 소첨차(小檐遮)를 보의 방향으로 놓고, 이 위에 대접받침을 놓아 초제공에 놓은 첨차를 받치고,
이 첨차는 외이출목도리(外二出目道里)의 장여를 받치고 있는 주심포식(柱心包式)의 건축이지만,

각 부재들은 오히려 다포식의 모습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

가구(架構)는 7량(七樑)으로 앞뒤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첨차와 소로[小累]로 싸여진 포작식(包作式)의 동자기둥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고,
이 종량 위에 초각된 판형(板形)과 대공(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누각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은

1715년(숙종 41)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쓴 글씨로 죽서루를 관동에서 제일가는 누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상층은 20개의 기둥으로 7칸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지만 원래는 5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래 건물인 가운데의 5칸 내부는 기둥이 없는 통간이고
후에 증축된 것으로 보이는 양측 칸의 기둥 배열은 원래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서로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넓은 널을 짧게 잘라 끼워놓은 마루)이며 천장은 연등 천장(椽背天障)인데
좌측 뒷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 일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였다

 우물마루바닥 밖으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기둥 사이는 벽체나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하였다.


이 누각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基壇)과 초석 없이 두리기둥 밑면을 그렝이질하여 자연암반 위에 직접 세운 것이다.

​절벽 위 자연 암반을 기초로 하여 건축되어 있고, 누(樓) 아래의 17개 기둥 중 아홉 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 여덟 개의 기둥은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웠으므로 17개의 기둥 길이가 각각 다르다


이 누각에는 숙종, 정조, 이이(李珥)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가 붙여져 있는데,
 ‘關東第一樓(관동제일루)’라는 대액(大額)은 숙종 때의 부사 이성조(李聖肇)가 쓴 것이다.


위 사진 중 아래 왼쪽은 율곡 이이의 시이고,

우측 편액에 쓰여진 이구(李玖)의 시 두 수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이 시의 원제는 '조부령출안관동기관동은군자'인데 판액에는 '죽서루(竹西樓)'로 썼다.
편액 글씨는 김충현이 썼다.


이구(李玖)의 '죽서루' 편액

三陟官樓是竹西(삼척관루시죽서)  삼척의 관루는 바로 죽서루인데
樓中嘉客沈中書(루중가객침중서)  누중 반가운 손님은 심중서로다
而今白首能詩酒(이금백수능시주)  백발이면서도 시와 술을 잘하니
暇日相遊爲說予(가일상유위설여)  여가에 모여 놀면서 이야기하네


억심동로(憶沈東老) 심동로를 생각하며 예찬하는 시다. 심동로의 본래 이름은 한(漢) 이다.

심동로는 고려 말의 어지러운 정사를 바로 잡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게 해달라고 공민왕에게 간청했다. 
여러차례 그의 마음을 되돌리고자 했으나 의지가 워낙 굳어 어쩔 수 없이 귀향을 허락한 왕은  
그의 뜻을 높이 사 '노인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동로(東老)라는 이름을 하사 했다.
이때부터 심한이라 이름대신 심동로라는 이름을 썼다.


고려시대 예빈시승(禮賓寺丞)을 지낸 이구(李玖)는 신재(信齋)심동로(沈東老 1310~1380)와 최복하(崔卜河)에 대한 시를 읊었다.
이구(李玖)는 '관동의 군자는 두 사람 심동로와 최복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심동로는 삼척 심씨(三陟 沈氏)의 시조이며 죽서루의 가객으로 이름 높았던 사람이고, 

최복하는 심동로와 함께 관동이군으로 일컬어지던 사람이었다.

이구(李玖)는 고려후기 문신, 1282년(충렬왕8) 원(元) 나라에서 진사에 급제한 뒤 고려로 돌아 왔다.
1350(충정왕2)에는 문과에 급제, 진사에 이어 목사를 역임했다.



최사간복하(崔司諫卜河) - 이구
鳳池司諫臥仙槎(봉지사간와선사)  봉지의 사간을 지내고 선사에 누워서
早和滄浪漁父歌(조화창랑어부가)  일찌기 창랑수의 어부가 뜻을 알았네
爲說鹽梅時所急(위설염매시소급)  염매를 맛있게 만드는 것이 시급하니
天廚鼎味待君和(천주정미대군화)  수라간에서 그대 조리 솜씨 기다리네


억최복하(憶崔卜河) - 최복하를 생각하며
상국(相國)이구가 최복하에게 보낸 시다. 임금을 잘 보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최복하를 예찬하면서
새로이 개창한 조선왕조에 참여할 것을 은근히 권유하는 권기시(權起詩)다.


봉지(鳳池)는 당나라 중서성(中書城)이 있는 못 이름인데 중서성을 일컫는다.  흔히 대궐안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선사(仙槎)는 '신선의 배, 신선이 뱃놀이한다'는 뜻으로 울진의 옛 애칭이다.
예로부터 풍광이 수려한 울진에 옛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신선이 뱃놀이하는 듯한 절승(絶勝)이라 찬미하여 고려 때부터 붙여진 별칭이다.
창랑(滄浪)은 동해 가운데 있는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즉 창랑주(滄浪州)의 준말이다.
염매(鹽梅)는 음식의 양념이 되는 소금과 매실을 말한다. 꼭 필요한 인재가 임금을 잘 보좌하여 좋은 정사를 베풀게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천주(천주)는 수라(水刺)간 별자리 이다.  수라간 별자리는 풍성한 음식을 관장하며 임금외에 문무백관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일도 주관한다.

이성계는 이구를 통해 최복하에게 '염매를 맛있게 만드는 것이 시급하니 수라간에서 그대 조리 솜씨 기다리네" 라면서

최복하에게 조선왕조에 참여할 것을 은근히 권유, 그러나 최복하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을 뜻을 나타냈다.
최복하는 울진과 삼척에서 여러사람들과 동지를 규합, 고려왕조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탄로, 이방원의 손에 죽고 말았다.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1837년(현종 3) 부사 이규헌(李奎憲)이가 쓴 글씨.


제일계정 (第一溪亭),  1662년(현종 3) 부사 허목(許穆)의 글씨.

이것은 오십천의 계류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죽서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죽서루 용문 바위.
죽서루 경내에 있는 용문바위는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이 사후(死後) 호국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어느날 삼척의 오십천으로 뛰어들어 죽서루 벼랑을 아름답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호국용이 오십천으로 뛰어들 때 죽서루 옆 바위를 뚫고 지나갔는데 그것이 용문바위 라고 한다.


죽서루 내에는 관동 제일의 죽서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용문바위와 송강 가사의 터, 선사 암각화 등이 있다.


​죽서루 선사 암각화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의 벽면에 물상(物像), 기호(記號), 성혈(性穴) 등을 그리거나새겨 놓은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 위에 여성 생식기 모양의 구멍을 뚫어놓은 성혈 암각이다.

​성혈은 선사시대에 풍요, 생산, 다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국적인 원시신앙의 형태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는 칠월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구멍에 좁쌀을 담아놓고 치성을 드린다음
그 좁쌀을 한지에 싸서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민간신앙이 성행했다

​성혈의 제작은 암반을 쪼아 깊이 판 다음 원형의 돌 또는 나무로 연마하여 구멍을 넓히면서 만든다
죽서루 경내의 성혈은 죽서루 동쪽 용문바위 위에 직경 3~4cm, 깊이 2~5cm 크기이며 모두 10개 이다.









오십천은 동쪽으로 흐르면서 오십 굽이 여울을 이루고 그 사이사이에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죽서루에 이르면 푸른 층암절벽이 높게 솟아 있는데, 맑고 깊은 소의 물이 여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로 감돌아 흐른다.


 〈죽서루기>에는 죽서루와 오십천이 이루는 경치를 관동팔경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경승으로 찬양하고 있다.

오십천은 삼척시를 가로질러 동해로 흐른다.
동해안에서 가장 긴 하천으로 ‘오십천’이란 이름은 발원지에서부터 동해까지 50여 번 돌아 흐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십천은 감입곡류, 즉 물돌이가 많은 하천이다.
오십천 협곡의 암벽들은 장기간에 걸친 침식과 퇴적작용으로 현재와 같은 다양한 지형을 형성했다.


죽서루가 위치한 곳은 오십천 협곡이 끝나는 곳으로 하천과 주변 협곡, 죽서루 절벽, 배후의 석회암 지형과

길게 늘어진 송림 등이 급경사의 산지와 어우러져 절경을 자아낸다


오십천의 푸른 물과 깎아지른 석벽, 그 위에 올라앉은 죽서루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죽서루를 둘러본 후 가야할 코스는 오십천을 건너 폭포 위 데크길로 가야 하는데  하맹방 해변까지는 거리도 멀고,

다음 해변까지는 볼거리도 별로 없고, 무리하지 않기 위해 혼자 다음해변까지 차를 이용하기로. 



자전거 타고가던 라이더들이 셔터 눌러달라기에 찍어 주니 본인도 눌러주겠다며 ... .


죽서루에서 혼자 삼척 종합버스정류장까지 걸어와 유채밭이 있는 한재밑 해변까지 택시 이용. 


택시 이용하느라 오분 해변은 들리지 못하고 유채밭이 있는 한재밑() 해변까지 직행. 


유채밭 있는 한재밑해변 도착.


유채밭 있는 한재밑해변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갑자기 흙먼지 바람이...






입구 도착했을 때 흙먼지 날리는 바람이 세게 불더니 꽃밭에 들어서니 꽃가루가 날려    

선그라스, 얼굴, 카메라 렌즈 등 온통 노란 세상으로 변한다. .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예보 듣고 비올까봐 불참한 사람들은 얼마나 약오를까... 문득 생각이. 









유채밭 둘러본 후 맹방 해변으로.

맹방해수욕장은 애들 어렸을 때 몇 가족이 함께 와 놀았던 추억이 있는 곳,

30 여년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바다는 그대로인데

어렸던 그 애들은 뿔뿔히 흩어져 각기 제 식구 거느리며 부모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 아래는 동영상,  화면을 크게해서 보면 바다를 보는 실감을 느낄 수 있다.

해파랑길 32구간(삼척) 중 맹방 해수욕장에서.(휴대폰으로 촬영)








상뱅방해변에서 하맹방으로 가며 버스기사님께 어디서 기다리는지 물어보니 더이상 가지 말라고 한다. 

뒤에 걸어오는 사람들이 너무 멀다며 유채밭에서 끝내고 싶단다.  



버스가 데리러와 타고 다시 유채밭으로.







트레킹 끝낸 후 물닭갈비 식사.




고속도로 달리며 일몰을 본다.


건강하게 걸은 오늘 하루에도 감사 하는 날.  다음코스가 또 기다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