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시월의 시 모음, 피천득 外 29人

opal* 2021. 10. 1. 18:47

 

시월 
                         피천득  

친구 만나고
울 밖에 나오니

가을이 맑다
코스모스

노란 포플러는
파란 하늘에


시월 
                         목필균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펼쳐 널면

허물에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시월 
                         이기철  

잘 익었는지 하나만 맛보고 가려다가
온 들판 다 엎질러 놓고 가는 볕살

베짱이 귀뚜라미가 나도 좀 데려가 달라고
악다구니 쓰는 시월



시월  
                                  이시영  

나비가 지나간 하늘 한복판이
북처럼 길게 찢겨졌다
그곳으로 구름 송이들이
송사리처럼 모여들어
엉덩방아들을 찧느라고
가을 한 자락이 오후 내내 눈부시다


시월 
                              이외수  

이제는 마른 잎 한장조차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시월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문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시월 새벽 

                                      류시화  

시월이 왔다
그리고 새벽이 문지방을 넘어와
차가운 손으로 이마를 만진다
언제까지 잠들어 있을 것이냐고
개똥쥐바퀴들이 나무를 흔든다

시월이 왔다
여러 해만에 평온한 느낌 같은 것이 안개처럼 감싼다
산모퉁이에선 인부들이 새 무덤을 파고
죽은 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저 서늘한 그늘 속에서
어린 동물의 눈처럼 나를 응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 그것을 따라가 볼까

또다시 시월이 왔다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침묵이
눈을 감으면 밝아지는
빛이 여기에 있다

잎사귀들은 흙 위해 얼굴을 묻고
이슬 얹혀 팽팽해진 거미줄들
한때는 냉정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럴수록 눈물이 많아졌다
이슬 얹힌 거미줄처럼
내 온 존재에 눈물이 가득 걸렸던 적이 있었다

시월 새벽, 새 한 마리
가시덤불에 떨어져 죽다
어떤 새는 죽을 때 가시덤불에 몸을 던져
마지막 울음을 토해내고 죽는다지만
이 이름 없는 새는 죽으면서
무슨 울음을 울었을까

시월이 왔다
구름들은 빨리 지나가고
곤충들에게는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리라
곧 모든 것이 얼고
나는 얼음에 갇힌 불꽃을 보리라

 

시월의 시 
                            류시화 

그리고는 가을 나비가 날아왔다.
아, 그렇게도 빨리
기억 하는가 
시월의 짧은 눈짓을
서리들이 점령한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태양의 영토가 아니다
곤충들은 딱딱한 집을짓고
흙 가까이
나는 몸을 굽힌다
내 영혼은 더욱 가벼워져서
몸을 거의 누르지도 않게 되리라.

 
시월의 시
                         류시화 

폭포의 물줄기 여위어 가고
뜨거운 불줄기 계곡을 뛰어내린다
눈을 감아라
이름 가진 것들 모두 빛나는 시월
기억하지 못하는 이름들을
모두 떠나게 하라
잊혀지는 것이 어디 이름뿐이랴
식어가는 것이 어디 마음 뿐이랴
봄이 세상에 오기도 전에
겨울이 오기도 전에 치솟던 몸을 식혀
금간 틈새에 이끼를 키워온 
저 억새밭 우뚝한 너럭바위를 위해
이 깊은 시월은 비워 두어라
사랑은 그렇게 깊이 묻혀있어서
빛나는 뿌리를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법


축 10월  
                             황인숙  

요 며칠 사이, 누군가 자꾸 창을 기웃거리는 것 같아
뒤숭숭해 있었다
나무 그대에게 내
흔들리는 손 보냅니다
작별이 아닌
안부의 손짓을

저기 저 들판에
겸허히 꿇어엎딘 무리들 보셨나요?
햇님과 바람에 경배드리는 낟가리들이군요
그대도 추수를 마치셨는지?
좀더 추운 날
달님보다 창백한 햇님 아래
그대의 들을 찾을
땅뙈기 없는 이를 위해
이삭이나 넉넉히 남기셨는지?
난 한다발 일국을 두겠어요
내 작은 뜨락에 들를
그대를 위해

축 10월!


시월의 시   
                               김주희  

임이 주신 시월의 가을을
염치 없이 훔치고 싶습니다
어디든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임의 시월에
가을을 가져 가고 싶습니다
노랑 .빨깡. 고운 연보라빛 !!
어쩌면 당신의 작품은 그리 손을 댈때가 없는지요~!!
충동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려 이 고운 한잎 슬그머니 따다가
몰래 내 속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오늘 저녁엔 님에 고은 향기에 흠뻑젖어 시월의 향을 맡아볼려구요
하늘 높은 시월에 펼쳐 있는 색도화지 고운 빛에 흥건히 젖어
당신에 가을 작품 전시회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네요
시월을 가져 간다는 허락도 없이
당신의 시월을 난 이미 훔쳐버렸으니까요


시월 이야기


                       이향지 

만삭의 달이
소나무 가지에서 내려와
벽돌집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조금만 더 뒤로 젖혀지면
계수나무를 낳을 것 같습니다
계수나무는 이 가난한 달을
엄마 삼기로 하였습니다
무거운 배를 소나무 가지에 내려놓고
모로 누운 달에게
"엄마"
라고 불러봅니다
달의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젖혀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아가야 아가야 부르는 소리
골목을 거슬러 오릅니다
벽돌집 모퉁이가 대낮 같습니다.

 
시월에
                      문태준

오이는 아주 늙고 토란잎은 매우 시들었다
산 밑에는 노란 감국화가 한 무더기 해죽, 해죽 웃는다
웃음이 가시는 입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꽃빛이 사그라들고 있다.
들길을 걸어가며 한 팔이 뺨을 어루만지는 사이에도
다른 팔이 계속 위아래로 흔들리며 따라왔다는 걸
문득 알았다.
집에 와 물에 찬밥을 둘둘 말아 오물오물거리는데
눈구멍에서 눈물이 돌고 돌다
시월은 헐린 제비집 자리 같다
아. 오늘은 시월처럼 집에 아무도 없다.


10월 
                         기형도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 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 이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을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비명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
 

시월 
                              김완하  

길가다 논바닥에 고인 가을
물의 여유와 긴장을 보았다
그곳에 내 얼굴 비추어보면
그래, 나는 또 한 해를
너무 부끄럽게 살아 왔구나
물의 가슴에 내 가슴을 묻고
도랑을 따라서 흘러가면
주변의 나무와 먼 산들이
알몸으로 누워 안기고
하늘의 구름이 한참씩
머물다 간다

비로소 구름도 뒷모습이 보인다

 
시월  
                             박기섭  

바람은 남실남실 벼논을 먹어간다
이랑이랑 일렁이며 윗벼미서 아랫비미로
한 입씩 베어물었다 되뱉으니, 저 금빛!

햇볕은 또 햇볕대로 태금이라도 하려는 듯
종일을 들명나명 체질하는 시늉이다
감흙을 받아낸 듯 봇물도 한결 누긋해지고
하늘에 깔아놓은 새털구름도 그렇지만
이제 더는 애운할 일 잰걸음 칠 일도 없이
짯짯한 인연의 여물터, 물살이나 볼 일이다


시월 
                           윤희상  

너를 버리면
무엇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는지 나는
걸어가다가 몇번이나
주저 앉아버리고 싶었다
우리들 곁으로 겨울이 오기 전에
갑자기 비가 내리지
아마 사람들은 거리에서 젖어 있을거야
이제 편지하지 말아다오
누가 지친 생활을 세 번 깨우기 전에는


 시월  
                         장만호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저녁이 오고
세계는 조금씩 녹슬어간다
새들은 허공에 밑줄을 긋거나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다
먼 곳을 생각하며 서로의 깃을 고르고
떨어진 깃털 하나
저녁의 푸른 공기 속에 가라앉을 때
나무들은 둥근 귀를 둥글게 열고
잎 마르는 소리를 듣거나 멀리
열매 떨어지는 소리를 뿌리로 듣는다
그 뿌리 흔들리는 순간
저녁은 어둠으로 녹슬어가고
어둠은 모든 빛나는 것들을 빛나게 해
등불이 등불을 부르고
별들은 서로를 껴안고 성좌를 이룬다
간혹 유성이 흐르기도 하지만 미동도 않는
대지 위에서
사람들은 불빛을 향해 흐르고
나는,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들을 생각하며
옛 애인에게 전화를 한다

 


시월
                          전동균  

백련산 밑 공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갈참나무 숲으로 사라지는 길

숲길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다
저물 녘이면 울음을 참듯
고개 숙인 나무들 아래
묵언수행하는 스님들의 그림자만
흐릿하게 비쳐올 뿐

오늘처럼
그 길 앞에 서성이다 서성이다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

밤늦도록 나는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
나를 받아주던 어떤 손을 생각하며
홈통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에도
소주잔을 건네는 것이다

 
시월
                           황동규 


1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

 

2
지난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리.
두견이 우는 숲 새를 건너서
낮은 돌담에 흐르는 달빛 속에
울리던 木琴소리 목금소리 목금소리

 

3
며칠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부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한 탓이리.

4
아늬,
石燈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5
낡은 단청 밖으론 바람이 이는 가을날, 잔잔히 다가오는 저녁 어스름.
며칠내 며칠내 낙엽이 내리고 혹 싸늘히 비가 뿌려와서...
절 뒤울 안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면 낙엽 지는 느릅나무며 우물이며 초가집이며
그리고 방금 켜지기 시작한 등불들이 어스름 속에서 알 수 없는
어느 하나에로 합쳐짐을
나는 본다

6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 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시월에는 
                            이민영 

시월에는
태우다만 낙엽의 가슴에 붉은 멍이 인다
읽어놓은 책장의 페이지가 바람의 옷을 잡고 서성이면
삶의 꽃들이 모여 들을 이루고
가을의 미래가 과거와 현재를 다독이며 파삭파삭한 희망을 건다 
그래서 시월에는 어머니 그 어머님적 밭이랑에서 핑갱 달린 소를 몰고
발대지게 진 아버지 뒤를 따르던 
아버지 시절이 되어본다.
미리, 山밭에는 뿌리의 겨울 날을 쓰다듬는
호미의 그렁 그렁한 눈물이 떨어진다.
가을은 가지 못하고
시월 안에서 잠을 잔다.

그가 봄, 여름이라고 써 놓은 하늘 아래서
비나리를 즐긴다는 것은 씨알이 되고자하는 계절의 흔들림이 아니던가
파문도 흔들리지 않으려 흔적이 되는 것이다.

 

시월 
                                   R 프로스트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너의 잎새들은 곱게 단풍이 들어 곧 떨어질 듯하구나
만일 내일의 바람이 매섭다면
너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말겠지
까마귀들이 숲에서 울고
내일이면 무리 지어 날아가겠지
오, 고요하고 부드러운 시월의 아침이여
오늘은 천천히 전개하여라
하루가 덜 짧아 보이도록 하라
속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을
마음껏 속여 보아라
새벽에 한 잎
정오에 한 잎씩 떨어뜨려라
한 잎은 이 나무, 한 잎는 저 나무에서
자욱한 안개로 해돋이를 늦추고
이 땅을 자줏빛으로 흘리게 하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미 서리에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새를 위해서라도
주렁주렁한 포도송이 상하지 않게
담을 따라 열린 포도송이를 위해서라도

 


10월의 노래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벽난로 선반 위에
메추라기의 박제가 서 있다
낡은 시계는 규칙적으로 똑딱 거리면서
저녁녘의 구져진 주름살들을 즐겁게 펴주고 있다
창문 밖에 나무 한 그루 ㅡ 흐릿한 양초 한 자루

나의 네번째 날은 제방 옆에서 공허하게 울리고 있다
자기 책을 옆에 접어놓고 바늘을 잡아라
그리고 내 속옷을 기워다오, 등불은 켜지 말고
눈부신 황금빛 머리 때문에
구석까지 밝으니


시월을 추억함

                                   나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이란 그저 신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풀꽃이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모습
아니야 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다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던가
향기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시월의 사유 
                                               이기철  

텅 빈 자리가 그리워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극한을 견디려면 나무들은 제 껍질을 튼튼히 쌓아야 한다
저마다 최후의 생을 간직하고 싶어 나뭇잎들은
흙을 향하여 떨어진다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부분을 기억하려고 나무를 만진다
차가움에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 나무들
모든 감각들은 너무 향기 쪽으로 기울어 있다
엽록일까 물관일까, 향기를 버리지 않으면 나무들은 삭풍을 이기지 못한다
어두워야 읽히는 가을의 문장들, 그 상형문자들은 난해하다
더러 덜컹거리는 문짝들도 제자리에 머물며 더 깊은 가을의 심방을 기다린다
나뭇잎들, 저렇게 생을 마구 내버릴 수 있다니,
그러니까 너희에게도 생은 무거운 것이었구나
나는 면사무소 정문으로 한 노인이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사람이 나뭇잎보다 더가벼워질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염소들이 지나간 길을 골라 걷는다
가벼운 것들
뽕나무잎 누에고치 거미줄 잠자리 제비집 종이컵 볼펜 다 읽은 시집들
그러나 나를 짓누르는 것들, 무거운 것들
불면증 서문시장 팔공산 조지 부시 아프간 전쟁 매리어트 호텔 영변 경수로
김정일 인천공항  유에스 달러
면사무소 은행나무 위에도 가을이 오고
이제 무들은 더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병든 새들과 가난한 사람들은 어서 집을 지어야 한다
이 주식의 가을에 사람들은 끝없이 회의를 하고
나뭇잎은 아무 것도 추억하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염소가 그렇듯이


시월 보름
                                  장석남  

른 녹이 낀 거울 속의 작은 부스러기 하늘이라고 해두자
나는, 냇가 모난 돌밭 틈에 난 작은 버드나무라고 해두자
나는, 가을날 라일락 밑동의 어둠이라고 해두자
ㅡ 거기 어디 향기의 자죽이라도 있던가?
나는 성곽의 가장 밑돌 틈에 가장 늦게 나와 핀 민들레라고 해두자
그리고 너는, 인류평화의 신앙은
그 민들레의 보름달이라고 해두자

키 크고
속눈썹 긴
보름달이다

 


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이기철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쏟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윈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흘러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들쥐들이야 몇 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제 가을바람이 남겨놓은 것들만이
내 것이다

시월은 또 작년의 그 자리에서
오래 참으며 나를 기다릴 것이다

 

 

10월의 시 
                               이재호  

왜 그런지 모르지만
외로움을 느낀다.
가을비는 싫다.
새파랗게 달빛이라도 쏟아지면
나는 쓸쓸한 느낌인 것은 무엇때문인가.
낙엽이 떨어진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또 무엇때문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것도 없이 허전하기만 한 것은
군밤이나 은행을 굽는 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왜 살부빔이 그리운가.
수없이 되뇌어 보는 말 가운데
사랑이란 말은
왜 나에겐 따뜻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춥다.
옷깃을 여민다.
내 등뒤에는 등을 돌리고 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울음처럼 들린다.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시월 

                       홍해리 
             
가을 깊은 시월이면
싸리꽃 꽃자리도
자질자질 잦아든 때,

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
팽팽한 긴장 속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머언 만릿길을
마른 발로 가고 잇는 사람
보인다.

물푸레나무 우듬지
까치 한 마리
투명한 심연으로,냉큼,
뛰어들지 못하고,

온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
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
추락,
추락하고 있다.
                                            -시집 [비밀]{2010}


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시월에 생각나는 사람 
                                        최원정  

풋감 떨어진 자리에
바람이 머물면
가지 위,고추잠자리
댕강댕강 외줄타기 시작하고
햇살 앉은 벚나무 잎사귀
노을 빛으로 가을이 익어갈 때

그리운 사람,
그 이름조차도 차마
소리내어 불러볼 수 없는
적막의 고요가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지
오지 못할
그 사람 생각을 하면


 시월
                     임보  

모든
돌아가는 것들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산은 너무 고운
빛깔로
덫을 내리고

모든 남아잇는 것들의
발성을 위해

나는
깊고 푸른
허공에
화살을 올리다.

 

 

 

시월을 추억함 
                               나 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이란 그저 신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풀꽃이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모습
 
아니야 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다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었던가

향기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시월의 노래
                            이형권 


그미야
가을 숲에는 어느새
무성했던 이야기들이 떠나가고 있다
이제 절벽같은 시간들만 남았다

누구나 한때, 봄날의 잎새처럼 푸르렀지만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세월이었던가.
천둥과 비바람이 치고 가는 저녁처럼
삶은 상처투성이였다

저승길에 누워 있는 노인의 모습처럼
가을 산은 만상을 품었고
떨어져 누운 나뭇잎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미야
바람이 불면 어느덧 시월의 끝자락이다
그 길을 따라서 하늘이 깊어지고
강물이 깊어지고 산 그림자가 깊어지듯이
낙엽 지는 가을 숲이 깊어지고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아득한 것이냐
서투르고 풋풋한 것들이 제 몸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비로소 앙금을 덜어내는 시간
사랑이면 더 깊은 사랑 속으로
이별이면 더 깊은 이별 속으로
가을 바람이 우리를 떠밀고 간다.

그미야
가을 숲은 긴 설움을 풀어내는 고해소와 같다.
가랑잎처럼 쌓인 슬픔을 헤아리듯이
운명처럼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가을 산 저 너머, 더 깊은 곳으로
길 위의 시간들처럼 늙고 저물어서
나는 빈 가지의 허허로움으로
새로운 계절 앞에 설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 날엔 
                                 김용화

시월의 마지막 날엔
잎새마다 꽃이 되었다.
어느 누가 미치도록 그리웠으면
가을이 되었겠는가
그리움이 모이면 가을이라 했는데
어느 누가 미치도록 보고싶었으면
저리도 절절한 가을 유서를 쓰겠는가
순희의 가을 낙엽은
고독한 이의 마른 눈물이라 했고
순회의 가을은
잊고 잊는 것이라 했다
첫눈 오는 날까지
까마득히 잊는 것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