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추분(秋分), 시와 산책

opal* 2021. 9. 23. 19:36

 

추분(秋分)      

                                          나유성           

 

오랜만에
당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걸 보니
몹시 외로운가 봅니다

 

저울에
당신을 향한
마음을 얹어보니
사랑과 미움이 수평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마음은
한 쪽으로 기울어지겠지요

 

추분 날에   

   

                                        海風 오태수

 

백로와 한로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 않고
오로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중심 꼭 잡고 있으니
갈 것은 떠나가고 올 것은 돌아오고 숨을 것은 숨으니
소슬바람 불어오고 가을이 영글어가는 오늘이네 

 

낮과 밤의 길이가 서로 똑같은 날이라 하니
너와 나의 사랑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고
늘 오늘 같은 날만 되고 쉬 식지 않은 열망 불타고
늘 그리움 쉬 저버리지 않은 애틋한 마음 맺히길

하얀 이슬이 빛나는 아침이면 밤새도록 서성이며
남기고 간 너를 가만가만 되 집듯이 떠올려 본다 


하얀 서리가 맺히는 날이 오기 전에 그대 가슴 그리움만 맺히고
갈 햇살에 그리움만 빛나는 애틋한 사랑이 영글어 갔으면

제비는 떠난다고 저렇게 인정사정없이 먹이 사냥 여념 없고
찬 서리 내린다고 저 알곡들 여물어 가는 소리 들리온데 


임은 어디에서 저 소리를 듣고 있을지 가을이 익어가는 추분 날
삭풍 부는 겨울이 저기 오기 전에 울 사랑 저울질 말아야지

 

산딸나무 열매 

아래 사진은 위 산딸나무 열매와 비교하기 위해 전에 찍은 것을 올려봄. 

 

시와 산책 

                                 한정원  
 
 벼들이 영글어
 들녘은 점점 초록을 내어주고
 조금씩 노란빛으로 변하고 있는 오늘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추석도 지나고,
 열여섯 번째 절기 추분절이다 
 
 나무잎들도 조금씩 색깔을 바꿔
 가을옷으로 갈아 입는 때,
 서툴게 살아서 익을 것도,
 거둘 것도 없으니
 홑이불에서 겹이불로 이부자리라도 바꿨다 
 
메뚜기들이 촐싹대는 논두렁길을
산책한다
갈색 억새꽃이 흰색으로 바뀌어 흔들거리고
여뀌꽃, 고마리꽃, 물봉선이 흐드러진
 가을길은 마음 좋은 누이 같아 좋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긴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철학가인 장자끄 루소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지 이동하거나 운동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명상이나 사색뿐만 아니라
나는 걸을 때야말로 비로소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어 좋다 
 
숲길이든 들길이든
나무가 많고 풀이 많은 길을 산책할 때면
 마음이 절로 보송보송해져 좋다 
 
모자란 게 많아서
사람노릇 잘 못하는 나같은 화상에겐
자연만큼 좋은 것도 없다 
 
그저 눈 닿는 곳마다
 꽃이고 싱그러움이고
풀벌레 소리며 산새들 노랫소리가
굳이 음악을 꺼내 듣지 않아도 좋고
내게는 고흐나 모네나 세잔느의 명화보다
더 좋다 
 
자연은 가난하다고 흉보지도 않고
무시하지도 않고 사람을 가리지도 않는다
언제든 품에 안아주는 넉넉함은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마음 통하는 사람과
허물없이 도란도란 이야기 하며
 흙길을 걸을 때면,
 이 세상 어느 카페나 고급 호텔 로비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좋다 
 
한 시간을 넘겨 걷다보니
속이 출출해져 홍시감 하나를 따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삼키고
 다시 돌아간다
 바보같은 또 하루가 접힌다 
 
산책은 휴식이다
살아있는 책이다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그런 다음 나의 내면이
다시금 바깥을 가만히 보는 것이다 
 
작고 무르지만,
일단 눈에 담고 나면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단단한 세계를" 
 
                                                          한정원 산문집 <시와 산책>
                                                                 (시간의흐름 2020)  중에서

 

 

 

24절기 중 열여섯 번째 절기. 추분점(秋分點)에 이르러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
추분점이란 천구상(天球上) 황도(黃道)와 적도(赤道)의 교점(交點) 가운데에서
태양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으로
적경(赤經), 황경(黃經) 모두 180°, 적위(赤緯), 황위(黃緯) 모두 0°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