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김 현승- 가을의 기도, 가을의 시, 책.

opal* 2006. 11. 9. 17:17

 


 

가을의 기도

                                                 김 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시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읍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책(冊)

                       김 현승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 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寶石箱子의 뚜껑을 열듯
조심스러이 책을 편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住宅들
아-- 가장 높은 정신의 城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一生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은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들
나는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1913 2월 28일 전남 광주시 양림동 출생. 평양 숭실중학 졸업  
1934 숭실전문 재학중 교지에 투고했던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때 당신들>이

양주동의 천거로 동아일보에 발표  
1937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1 광주 조선문리대 졸업  
1955 한국 문학가협회 중앙위원, 한국 문학가협회 상임위원 역임  
1960 숭전대 문리대 교수  
1975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