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영갑.
1957년 충남 부여 출생,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던 중 그곳에 매혹되어,
1985년 아예 섬에 정착.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 섬 곳곳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억새 등 그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제주도에 없는 것이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섬의 '외로움과 평화'를 찍는 사진 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모두 받친 것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하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왔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루게릭(lougehrig, 근위측성측삭경화증: 온몸의 근육이 점점 위축되는) 병이 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선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고에 쌓여 곰팡이 꽃을 피우 사진을 위해, 또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손수 몸을 움직여 사진 갤러리를 만들었다.
2001년- 성읍마을에서 성산포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는 삼달 분교를 얻더 두모악 갤러리 터를 닦다.
2002년- 여름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 문을 열다. 옥상에서 표선 앞 바다가 보인다.
생의 봄날을 향한 고행
하늘을 본다. 습관적으로 무의식 중에도 하늘을 본다. 별이나 달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름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기 위해 하늘을 본다.
구름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도 달라진다. 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가면 내 마음도 수굿해지고 구름이 조급해지면 내맘도 덩달아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구름의 변화를 쫓아 동분서주하며 섬에서 20년 세월을 보냈다.구름은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는다.
변화 무쌍한 구름을 쫓아 다니며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깊은 생각이 잠기곤 하며 긴 세월을 지나왔다..
어느날 나에게 광풍과도 같은 루게릭이 엄습해 왔다. 루게릭 진단을 받기 전까지 나는 그런 병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사진을 계속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살아있음에 끝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나의 사진 속에는 비틀거리며 흘려보낸 내 젊음의 흔적들이 비늘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좌절, 분노…. 내 사진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김영갑은 사람이면서도 자연의 신령한 정령을 먹고살며,
자연에게 말을 걸고 자연이 들려주는 신비한 음성을 사진에 담을 줄 아는 작가이다.
그의 사진 속에서 꿈틀거리는 원초적 적막감과 그리움은 근원적으로 고독 저편 신화의 마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그가 루게릭 병원균에게 살과 근육을 송두리째 내주고도 살 수 있는 것은 그런 내공을 닦은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과 합일되어 아름다움을 창조하는가를 보여주는 흔치 않은 모델이다.
언젠가 그가 이어도로 자취를 감추는 날, 그의 예술도 대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안 성수 '이어도를 훔쳐본 작가' 중에서.
안에서 내다 본 앞 뜰
열려진 대문을 통과하니 제주 특유의 까만 돌로 높게 쌓아, 곧은 길 없이 요리조리 돌며 곡선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2005년 5월 29일 눈을 감았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가 남긴 육신의 흔적을, 생전의 그가 갤러리 뒤란에 심어놓고 애인처럼 아끼던 감나무 밑에 뿌렸다.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욕심을 부릴 수 없게 되니까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정 희성-
'Story(문화,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찾은 땅끝 (0) | 2007.01.04 |
---|---|
음악회) 양방언 Chrismas Concert (0) | 2006.12.20 |
연극) 胎 (0) | 2006.11.16 |
영화) Radio star &... 썰물 - 장 석주. (0) | 2006.10.13 |
원고 (0) | 2006.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