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장 석주 - 시골로 내려오다,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애인

opal* 2007. 8. 1. 13:40

 

 

시골로 내려오다

 

                        장석주

 

당신의 정부는 더 이상 내 정부가 아니다

나는 당신을 버렸다 내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당신의 경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내가 지켜야 할 계율은 내가 만든다

당신을 떠나면서 점집에 갔더니 구설수를 조심하라고 한다

구설수란 누구에게나 붙는 국민연금이거나 지방세 같은 것이다

 

  당신을 버렸지만 길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릇 길들이란 땅 위에 세운 당신과 나의 삶의 유적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이 바뀐다

길 없는 길 위에 서서 새 길을 꿈꾼다

 

  끼니때가 되면 쌀을 씻어 안치고

밥물이 끓는 동안엔 슬하의 것들을 돌보아야 하는 일과는

매우 신성한 것이다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잘 때가 되면 눈을 붙인다

고립은 그것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자에겐 고립이 아니다

심심한 큰 개가 희디흰 햇빛 속에서

저보다 몸짓이 작은 강아지의 목덜미를 물고

마구 흔들어댄다

어디에서나 힘없는 것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있다

 

  노란 수박꽃 밑에 엄지손톱만큼 작은 수박이 매달렸다

지금 이 순간 부화하지 않는 것들은 끝내 부화하지 못한다

올 봄에 심은 나무 중에 석류나무가 가장 늦게 잎을 피워낸다

저수지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비가 없다

벌써 용솔 묘목의 반이 벌겋게 잎이 말라죽었다

물의 문하에 들어선 자에게 이보다 더 큰 실망은 없다

나는 절망함으로써 절망을 채찍질하며 건너갈 것이다

너무 크게 상심하지 않기로 한다

 

  이 순간을 살지 못하는 당신에겐 삶이 없다

이 순간에도 당신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내 전생은 라마승이었으니

마흔 너머부터는 라마승의 삶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큰 불편을 냉큼 받아들였더니

마음의 작은 불편들이 입을 다문다

시골에 오니 비로소 희망이 있었다

 

 

        다시 첫 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장 석주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있는

아무도 가지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를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 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 오를 때

바다에 온 몸을 던지리라

 

 

애 인

                 

                 장석주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은 자 전 隱者傳 

                 

                               장석주

황제 요堯가 허유許由를 찾아와
후계자가 되어달라고 청하니
허유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

친구 소부巢父가 그 소문을 듣고
허유를 불러, 네가 어딘가 빈틈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들은 것이라고 꾸짖으니,
허유가 시냇물로 나가
귀 씻고 눈을 닦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