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안 도현- 진흙메기, 매생이국, 안동식혜. 갱죽, 무우 말랭이, 돼지고기 두

opal* 2008. 1. 29. 15:00

 

 

 갱 죽

 

                   안 도현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공양

 

                         안 도현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山)벌의 날갯짓소리 입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微動)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 왔다는 말

 

                                                         안 도현

 

어릴 때, 두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무우 말랭이

 

                             안 도현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 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 글썽 울었다

 

 

안동 식혜

 

                        안 도현

 

찹쌀을 고들고들하게 쪄서 엿기름에 물을 담고

생강즙과 고춧가루 물로 맛을 내 삭힌

이 맵고 달고 붉은 음식을 특별히 안동 식혜라 부른다

 

잘 삭은 밥알이 동동 뜨고

나박나박 썬 무와 배도 뜨고

땅콩 몇 알도 고명처럼 살짝 뜨는데

 

생전 이 음식을 처음 받아본 타지 사람들은

고춧가루에서 우러난 불그죽죽한,

그 뭐라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이 야릇한 식혜의 빛깔 앞에서

그만 어이없어

‘아니, 이 집 여인의 속곳 헹군 강물을

동이로 퍼내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건가?’

생각하고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진흙 메기

 

                안 도현

 

 

짚불을 피우고 배를 딴 메기를 몇마리 던져넣었다

메기들은 내장도 없이 불꽃속으로 맹렬히 헤엄쳐 갔다

가문 방둑 잿빛 진흙에 대가리를 들이밀듯 꼬리지느러미로 땅을 쳤다

 

삶이란 부레도 없이 허공의 물위로 풀쩍 솟구쳐 오르기도 하는 것

붉은 열망이 가라앉아 뻣뻣해지자 저녁이 재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진흙이 다 된 메기들은 그때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달려들어 쫄깃한 진흙의 살을 뜯어먹으며

어쩌면 코밑에 메기 수염이 돋아날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매생이 국

 

                  안 도현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는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하나?

뜨거운 울음이라고 해야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간절하게 참 철 없이'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