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할 시간을 놓치는 바람에 잠이 빨리 안 온다. '이제 자자니 그렇고, 잠 들었다 못 일어나면 어쩌나.'
강박 관념으로 뒤척이고 있는 중인데 비 쏟아 지는 소리 들린다. 창 열고 내다보니 빗줄기가 제법 굵다.
시계를 보니 새벽 세 시가 다 되었다. 알람 시간이 네 시이니 이젠 잠을 잘 수가 없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니 어쩌면 안 갈지도 몰라, 안 가면 못 잔 잠이난 실컷 자야지...'
다섯시 쯤 되어 대장님께 전화. "비가 많이 내려 골치 아프시죠?"
"골치 아플 것 하나도 없어요. 뭐 안 나온다는 분이 계셔야 골치 아플텐데
아직 못 나온다고 연락하신 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러면 그렇지 안 갈리가 있나 가는 동안 차에서나 자야 겠구나'
'전국적으로 비, 지역에 따라 국지성 호우로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 예상'.
중부지역의 예상 강우량이 40~100mm. 일기예보 듣고 내리는 비 맞으며 집 나서서 차에 오른다.
차에 오르는 반가운 얼굴들 대할 때마다 하는 말이 너도 나도 서로 똑같다.
"이렇게 비 많이 오는날 집에 가만히 있지 왜 나왔어요?"
대형 Bus 좌석 거의 다 찼다. 우중 날씨 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이토록 많은 님들을 불러냈을까?
산행 예정지는 경북 문경 쌍룡계곡을 품고 있는, 자신 보다는 속리산 조망이 아름답다는 도장산.
그러나 산이 좋다고 무조건 갈 수는 없는 노릇, 자연을 우습게 여기는 무모한 짓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출발 후 달리는 차 안에서 의논하여 비가 덜 내리는 강원도 지역 중 서너 곳 선택,
대관령에서 가까운 능경봉, 고루포기산과 동해안 가까운 괘방산 등 등...
비 내리는 양을 봐가며 최종 산행지를 결정 하기로 하고 일단 대관령으로 향한다.
오락가락하는 굵은 빗줄기 속에 일찍 출발하여 중간에 만나는 고속도로 휴게소,
집에서 먹고 나온 분, 식당에서 매식 하는 분들도 있지만 파고라 아래 벤취에 도시락 펼치고 옹기종기 앉아
음식과 정을 나누는 아침식사는 늘 새롭고 재미있어 맛이 배가된다.
영동고속도로는 언제나 차량이 많다. 가을 단풍, 겨울 스키, 지금은 피서객으로.
길지 않은 둔내 터널을 통과하니 '언제 비가 왔더냐' 도로가 뽀송뽀송하다.
통과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르다니, 아~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 구나. 함성 또 함성.
"그러면 먼 곳까지 갈 필요 없이 능경봉으로 정합시다."
구 도로 대관령(832m) 주차장(10:20)은 겨울철 눈 산행지로 인기있는 선자령이나 능경봉의 들머리다.
겨울에 왔을 때는 늘 한적하고 쓸쓸 했는데 여름이라 그런지 차들이 많이 와 있다.
하차하여 스트레칭으로 몸풀고 계단 올라 고속도로 준공탑 앞에서 단체로 기념 남기고 들머리 들어선다.
겨울에 올 때면 북풍 한설이 뺨을 때리던 곳, 무릎 이상 눈에 빠져가며 오르던 곳이다.
북쪽으로 길 건너 통신 중계소와 풍력 발전기들이 조망되는 들머리 오르막.
지금은 무성한 나뭇잎과 운무가 조망을 감추어 놓았다. 몇 번 왔었지만 여름철에 오기는 처음이다.
나목과 흰색만 보다 초록색으로 뒤덮인 무성한 숲을 보니 풍성하고 여유있다. 대감 집 마당에 서 있는 기분이다.
올 1월 마지막 날도 이곳에 왔다가 많이 쌓인 눈에 Russel이 안되어 할 수 없이 대관령 옛길을 걸었었다.
산림 복원을 위하여 경계 밧줄을 매어놓은 기둥이 머리 부분만 남고 아랫부분은 눈에 다 묻혔었다.
기둥 옆에 스틱을 대어 보니 길이가 같다. 스틱 손잡이 길이 정도만 남고 다 묻히도록 눈이 쌓였던 것이다.
이른 봄, 얼음기둥 서릿발이 하얗게 서리며 들떴던 고목 아래 진흙은 잦은 비로 곰팡이가 피어 하얗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거칠은 숨소리, 일행들 속도가 빠르니 맨 뒤로 밀려나며 내 페이스 대로 오른다.
능선 거의 오르니 일행들 웃음소리 크게 들린다. 무엇이 저리도 재미 있을까, 올라서 보니 과일 간식 먹으며
목질부가 파여 껍질만 둥글게 남은 굵은 고사목 틈에서 기념 남기니 날씬이와 통통이로 구별되어 깔깔댄다.
무거운 바나나 몇 송이 지고와 베푸시는 님께 감사드리며, 가방 속 수박도 꺼내 함께 나눈다.
다른 날은 점심 식사 후 먹던 디져트를 오늘은 산행 길이가 짧아 무게 줄이려고 일찌감치 꺼낸 것이다.
산행 시작 한 시간 걸려 헬기장 지나 능경봉(1123.2m) 도착(11:25),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비가 많이 내리면 아예 산행을 안 할텐데 산행 도중에 내리면 시원해서 좋다.
우의는 준비 했으나 더워서 안 입고 가방 커버만 씌우고 카메라 때문에 우산을 펼쳐 들었다.
여름철 산행은 하산 후 계곡물에 들어섰다 나와 갈아 입을 여벌 옷이 있으니 젖어도 걱정이 없다.
행운의 돌탑 지나고 샘터 갈림길 지난다. 등산로는 육산이라 진흙에 미끄럼만 주의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내려 딛는데 몸은 따로 놀고 싶은지, 작은 돌멩이 길 내려 딛다 주르륵 미끄러지며 팔굼치에 작은 상처 남긴다.
눈만 밟으며 걷다 흙을 밟으니 새로운 맛이 난다. 횡계령이 가까워 온다. 아래로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곳,
좌측 아래로 잘 보이던 고속도로, 무성한 잎과 운무로 안 보이고 터널을 나와 신나게 달리는 차 소리만 들린다.
좀 더 오르니 잠시 앞으로 건너다 보이는 고루포기산은 구름이 지나가며 보여주다 말다 한다.
왕산골로 하산 할 수 있는 갈림길 쉼터, 먼저 온 일행들 우의를 걸친 채 서서 막걸리 파티 중.
주시는 분께 감사 드리며 시원한 냉 막걸리 한 잔 얻어 마시니 뱃속까지 시원하다.
막걸리나 동동주를 마시면 속에서 거부해 몇 십 년을 입에 대지 않았었는데
올 여름 들어서서는 면역을 키우리라 작정하고 산행 중엔 어쩌다 한 번씩 마셔본다.
처음엔 속이 더부룩하고 이상하더니 두어 번 마셔 보니 괜찮은 것 같다.
이렇게 뒤늦게 배워 나중엔 한 두병씩 지고 다니다 주정뱅이로 전락하게 되지는 않을까?
고루포기산을 향하는, 대관령 전망대가 있는 곳을 오르는 길은 된 비알.
백두대간 정비사업 인지 가파르게 곧은 길을, 부분적으로 갈 之字로 새로 만들고 있는 곳도 있다.
오르다 뒤돌아 보면 나무 사이로 능경봉이 보였었는데 오늘은 전혀 안 보이고 비만 오락가락 한다.
오르다 힘들면 쉴겸 셔터 누르다 보니 우리꽃 종류가 다양하고 많다.
몇 번을 눈 속에서만 다니다 보니 꽃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이름 모르는 꽃들이 많다.
이틀 전 동대산에서 두로봉으로 대간 길 걸으며 보았던 많은 꽃들이 여기에 다 있다.
마타리, 비비추, 쉬땅나무, 동자꽃, 하늘 말나리, 며느리 밥풀꽃, 단풍취, 참취, 잔데, 모싯대, 당귀, 박새,
물봉선은 색도 여러가지, 흔치않은 하양 노랑 그리고 진분홍. 투구꽃은 이제 봉오리 맺힐 준비 중이다.
날씨가 좋으면 잘 찍힐텐데 하는 아쉬움, 그 대신 시원하게 산행 중이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셔터 누른다.
대관령 전망대(13:20), 오늘은 전망대란 명칭을 취소해도 되겠다.
북쪽으로 보이는 선자령과 풍력발전기, 황병산까지의 광활한 조망이 일품이요 백미인데
오늘은 전혀 아니올씨다다. 뿌연 운무로 가까운 곳 조차도 거부하고 있다.
땀 식히며 잠시 서서 휴식 취하고 다시 오른다.
나무 사이로 운무가 뽀얀 넓은 숲, 그러지 않아도 멋진 분위기인데 야생화들이 덩달아 향연을 베풀고 있다.
많은 꽃들과 대화 나누며 왕산골 갈림길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일행들 삼삼오오 도시락 펼쳤다(13:40).
울진에서 공수하여 즉석에서 야채 넣고 달콤새콤 얼큰하게 버무린 시원한 세꼬시 무침,
살짝 얼기 직전의 차가운 온도로 질기지 않은 돌문어, 몇 점 얻어 먹으니 꿀맛이다.
이렇게 베푸는 분들이 있어 많은 식구가 행복한 시간, 잔치집 같은 분위기다.
늘 하산 후에 먹는 팀들은 산정에서 먹는 이 맛을 알 수 있으려나?
식사 후 하산 할 사람은 오목골로 내려 딛고 몇 몇 희망자는 고루포기산 정상으로 오른다.
철탑이 있는 곳도 나무가 없어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인데 어디가 하늘이며 땅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고루포기산 정상(1238m)(14:35),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와 강릉시 왕산면 경계가 되는 곳이다.
정상 표지석은 없고 기둥과 의자가 있는데 그나마 팻말 날개도 떨어져 손으로 집어 들고 기념 남긴다.
고루포기산 정상에서 직진하면 닭목재로 가는 백두대간 등산로, 오늘은 이곳까지만 밟기로 한다.
정상에 서면 발왕산의 용평 스키장 슬로프가 조망되는 곳, 선자령 넘어 황병산까지 조망되는 산.
그러나 오늘은 나뭇잎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산, 그래서 염천 더위에 시원하게 산행 할 수 있었다.
돌아서서 점심먹던 삼거리로 내려 딛고 오목골을 향해 하산, 가파르기가 심해 밧줄잡고 내려 선다.
내린 비도 있거니와 숲이 깊어 습기가 많아 등산로가 더 미끄럽다. 다시 땀이 흐른다.
한 시간 정도 내려 딛으니 작은 폭포 이루며 계곡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
얼굴과 손 대강 닦고 30분 정도 더 내려딛어 수량 많은 차디찬 계곡물에 온 몸의 땀 골고루 닦으니
이 시원함을 어디다 비할까? 옷 갈아 입고 임도 따라 내려 서니 구름이 또 몰려 오며 사방을 어둡게 만든다.
횡계 5리, 길가에 핀 아름다운 꽃들과 운무를 찍으며 룰루 랄라 내려 서니 빨간 애마 흐릿하게 보인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산행 한 하루 감사드리며 차에 오른다(16:30).
산행 소요시간 6시간.(먹고 마시고 땀 닦고 모두 포함)
(대관령~ 산불감시초소~ 능경봉~ 행운의 돌탑~ 횡계령~왕 산골 갈림길 쉼터~ 대관령 전망대
~ 오목골 갈림길 쉼터~고루포기산 - 되돌아 삼거리에서 오목골로 하산- 횡계5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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