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恭陵)
조선 8대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 1445~61) 한씨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 세조 때 한명회는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병약한 세자(덕종)가 죽고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한명회는 1460년 그의 딸을 세자빈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그의 딸은 다음해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을 앓다가 17세 어린 나이로 승하했다.
장순왕후에 이어 예종도 짧은 재위기간을 마감하고 요절했다.
장순왕후는 아름답고 정숙하여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 시아버지인 세조에게 사랑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세조는 왕세자빈에게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470년(성종 1) 능호를 공릉이라 했고, 1472년 장순왕후로 추존되었다.
홍살문 우측 안쪽 바닥에 능에 온 임금이 절하는 배위가 있고 박석이 깔린 참도가 직각으로 한 번 꺾이면서 정자각까지 뻗어 있다.
정자각 뒤 급경사 사초지를 올라가면 능상(봉분)이 있다.
※ 배위 (홍살문 오른쪽에 있어 왕이 제사를 지내러 왔을 때 홍살문 앞에서 절을 하고 들어 가던 곳,
수능관(守陵官), 헌관, 향축을 올리는 신하들은 이곳에서 4배를 올린 후 들어 갔으며
나올 때에도 4배를 드렸다. 능에 참례하는 신하들은 여기에서 망배(望拜 - 멀리 보고 절함)를 드렸다.
예종 등극 전 나이 열일곱에 세자빈으로 죽어 1461년(세조 7) 묘를 만들 때 왕후의 능이 아닌 세자빈묘로 조영,
한 번 쓴 묘나 능은 더 치장하지 않는 다는 조선왕조의 관례에 따라 세자빈 (世子嬪) 묘 그대로다. 그렇기 때문에
난간이 없는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돌말[石馬]이 시립하고, 각각 두 마리의 돌염소와 돌호랑이가 능을 호위하고 있을 뿐이다
장명등과 문인석. 문인석만 있고 무인석이 없고 난간석도 두르지 않았다.
망주석(望柱石)도 없고 능상 주위 곡장 안으로 석호와 석양은 있다. 병풍석은 세조가 없앴다.
문인석은 홀(笏)을 손에 든 양식이고, 옷주름 등이 조선 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선이 딱딱하고 굳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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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부터는 他人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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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順陵)
순릉 입구. 산자와 죽은 자의 공간을 가르는 냇물(금천 禁川)을 넘어 홍살문이 있고 참도가 끝나는 곳에
정자각,정자각 뒤 급경사 사초지 위에 능상이 있다.
공릉과 달리 순릉은 왕비능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74)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순릉과 마주보고 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공헤왕후는 1467년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 자산군에게 출가했다. 효심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며
건강을 잃어 재위 14개월만에 승하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세에 불과,
15세인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 되었다.
예종과 성종은 숙질(叔姪) 이니 자매(姉妹)사이에 시집와서 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된 것이다.
공혜왕후는 어린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삼전(세조비 정희 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 계비 안순 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왕비로 책봉된지 5년만에 후사 없이 승하한 공혜왕후는 왕비의 신분이었기에
세자빈으로 돌아가신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에 비해 석물이 더 많다.
공릉에는 없는 무인석과 난간석을 돌렀다, 망주석도 곡장 안 좌우에 세웠다.
무인석
문인석
↓영릉(永陵)
위 공릉 장순 왕후(1445~1461)와 순릉 공헤왕후(1456~1474)의 시대로부터 약 250년 뒤,
영조의 장자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 1719~28)와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1715~51)의 능이다.
진종은 1725년 7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숨을 거두자 시호를 효장(孝章)이라 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게 한 뒤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왕세손(정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통을 잇게 했다.
진종(眞宗)은 '태정태세 문단세'에 나오는 임금이 아니다. 영조의 맏아들로 열 살에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추존한 묘호(廟號),
사도세자의 형이다. 영조는 사도세자을 죽인 뒤 세손- 정조로 하여금 친아버지가 아닌 큰아버지 효장세자 뒤를 잇게 한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 세자는 양부(養父)로서 진종으로 추존 되었으며 그 후 1908년 고종황제가 건원칭제할 때
황제로 한 번 더 올려진다.그리하여 진종 소황제가 되었고 비각에는 세 종류의 비석이 남아 있다.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는 당대 소론(少論)대신 조문명의 딸이다. 효순소황후는 1727년 세자빈에 간택 되었고,
1735년 현빈(賢嬪)에 봉해졌으나 37세에 소생 없이 승하 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효순왕후로 추존 되었으며, 1908년 다시 효순 소황후로 추존 되었다.
정자각 위로 본 영릉 능상.
추존은 되었지만 죽을 당시엔 어린 세자의 묘(묘)이기에 왕비릉인 순릉에 비해 격이 떨어진다.
곡장을 두르고 석호, 석양, 망주석과 문인석 한 쌍을 두었을 뿐 무인석도 없고 봉분 주위 난간도 없다.
영릉 능상 정면. 왼쪽이 진종, 오른쪽이 효순 왕후 조씨이다.
혼유석은 각각 놓았으나 장명등은 가운데 하나만 두었다.
정조 친아버지 사도세자 - 장조의 융릉(화성에 있음)은 당시에 이미 사라진 풍속 병풍석을 되살려 붙였지만,
양 아버지 진종의 묘는 세자묘 그대로다.
영릉 후면
망주석, 조선 후기로 내려오며 석물 세공이 꼼꼼하고 사실적이다.
망주석 세호(細虎)
혼유석(다릿돌) - 고석(敲石)조각
소략한 능침 공간의 석물들에 비해 정자각은 규모가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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