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

프랑스, Louvre 미술관

opal* 2010. 6. 17. 05:30

 

  2010-06-17(목)

 

Louvre 미술관

1793년에 프랑스 공화국에 의해 설립된 루브르 미술관은 800년에 걸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애슈몰린 미술관(AshmoleanMuseum,1683년)과 드레스덴 미술관(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1744년),

그리고 바티칸 미술관(1744년)등으로 나열하며, 유럽에서도 최대 최고의 미술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중세의 성에서 프랑스 역대 왕의 궁전, 그 후로는 미술관으로 그 건물양식이 발전해 왔으며 규모는 약 6만㎡에 달한다.

프랑스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의 한부분을 차지했으나 지금은 국제적인 명성에 힘입어 궁전보다는 미술관으로서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다.

수집된 미술품은 고대에서 19세기까지의 오리엔트 및 유럽 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으며 등록 완료된 작품만 해도

총 40만점을 넘는다. 작품은 각 부분마다 연대,지역별로 분류되어 회화 및 공예 부문은 2,3층에 조각 부문은 1,2층에 진열하고 있다.
그리스-로마, 이집트, 오리엔트, 회화, 조각, 가구 등 8개 부분으로 구분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 다비드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이집트의 '함무라비 법전' 등이 유명하다.

 

여행 첫 밤을 지낸 숙소와 첫 아침식사는 달랑 빵과 음료수 정도.  左下- 노틀담 사원(프랑스 최고의 고딕 성당)

 

 

↑동서 약 1km, 남북 300m의 엄청난 규모의 루브르 박물관. 

외관 자체도 아름다운 박물관은 궁전으로 쓰이던 건물이다. 길 조차도 아름다워 아직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설렌다.

 

잔다르크 동상(차를 타고 가며 창을 통해 찍은 모습)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과 뒬르리 정원 사이에 있는 피라미드 광장에 잔다르크 황금 동상이 있다.

 

가톨릭의 성녀(). 로렌과 샹파뉴사이에 있는 동레미라퓌셀의 독실한 그리스도교가정인 농가에서 태어났다.

1429년의 어느 날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음성을 듣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서 루아르 강변의 시농성()에 있는

샤를 황태자(뒷날의 샤를 7세)를 방문하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북반부를 영국군 및 영국에 협력하는 부르고뉴파() 군대가 점령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왕위도 1420년의 트루아의 조약에 따라 샤를 6세 사후에는 영국왕 헨리 5세가,

또 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헨리 6세가 계승하도록 되어 있어, 황태자 샤를은 제외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잔 다르크는 샤를을 격려하고 그에게서 받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영국군의 포위 속에서 저항하고 있던 오를레앙 구원에 앞장서서 싸웠다.

영국군을 격파하여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데 이어 각지에서 영국군을 무찔렀다.

흰 갑주에 흰 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지휘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만 보고도 영국군은 도망하였다.

이리하여 그 해 5월 상순, 영국군은 오를레앙에서 완전히 패퇴하였다.

랭스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이곳 성당에서 전통적인 전례에 따라 샤를 7세의 대관식()을 거행토록 하였다.

이에 샤를 7세는 영국의 헨리 6세에 앞서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잔 다르크에 대한 왕의 측근들의 질시와 선망 속에서도

잔 다르크는 더욱 충성을 하였다. 1430년 5월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 군사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졌다.

1431년, 재판에서 마녀로 낙인 찍혀, 이단() 선고를 받고 루앙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뒤에 샤를 7세는 앞서의 유죄판결을 파기(1456), 명예를 회복시켰고, 가톨릭교회에서는 1920년 그녀를 성녀로 시성()하였다

 

루브르 미술관 출입문.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출입문이 다르므로 일행과 떨어지지 말라는 주의를 준다.

 

下- 천정화, 유리 피라밑 아래는 박물관 중앙으로 나선형 계단이 있다.

중앙에 위치한 유리 피라미드는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여 Ieoh Ming Pei에 의해 설계된 것으로,
603장의 유리로 이루어진 화사한 외관과 고풍스러움과 최첨단의 만남이 색다른 조화를 이루어 루브르의 또 하나의 명물이 되었다.

또한 피라미드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복잡한 박물관 내부를 하나로 모아주는 입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83년에 착공해서 1989년에 완공된 유리 피라미드는 박물관의 일반인 출입구로써 내부 유적 발굴과 전체 보수비를 포함해서 20억 프랑이 투자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길이 220m, 폭 110m 이다. 

 

 

 

上 - 미술관 입장권과 중앙의 나선형 계단, 下 -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비상 출입문과 현지 안내원.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관람객이 많아 미술품 감상하다 일행을 잃을 경우 만날 수 있는 장소부터 얘기해 준다.

 

 

조각실 부터 들어서니 눈이 휘둥그레 진다. 어느 것 부터 보아야 할지, 이렇게 귀한 작품들을 직접 감상 할 수 있음에 감사 드린다. 

 

죽어가는 노예, 미켈란젤로.

해부학에 정통한 미켈란젤로가 7년에 걸쳐 만든 작품. '하얀 대리석 속에 같힌 인간을 해방 시키는 것'이 조각이라고 생각 했단다.

죽어가는 노예치고는 얼굴이 너무 평온하다. 노예의 삶보다는 죽음이 편해서 일까?

 

반항하는 노예, 미켈란젤로.

율리오 교황 2세의 영묘를 장식하기 위해 만든 작품. 교회의 억압과 권력 아래서 작업하는 자신의 모습이 반영된 작품 이란다.

뒤틀어진 모습이 역동적이다.  죽어가는 노예와 두 점이 한 가운데 나란히 Set로 서 있다.

 

문 입구에 세워진 문 자체가 소장품 이다.

 

 

샤를 7세 대관식의 잔다르크 가로 178, 세로 240cm. 앵그르의 1851~1854년 작품,

19세기 프랑스에 대두하기 시작한 신고딕 양식의 교회와 같은 건축상의 치밀한 묘사와 경건하면서도 강각적인

그리스도교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목적으로 오클레앙의 처녀 잔다릌르를 그림으로 표현 하였다.

 

잔다르크가 중앙에 서 있고 그 뒤에는 수도사와 신도들이 경배의 몸짓을 하고 있다.

샤를 7세의 영광스런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이지만, 대관식을 주제로 삼지않고 잔다르크의 영웅적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딱딱한 갑옷의 질감은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이미지를 주고 한 손에 들고있는 깃발과 머리 뒤에 입혀진 후

광은 잔다르크의 이미지를 현실적인 여인의 모습이 아닌 이상화된 신비한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단 위에 놓인 촛대와 여러가지 성물들, 몸에 부착된 도끼, 칼, 철갑, 마스크, 장갑 등의 세밀한 묘사는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어둡고 차가운 색체감으로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으며, 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림 왼쪽 끝에 무관으로 묘사된 인물은 앵그로의 자화상으로 전해진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들라크루아.

프랑스가 선물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도 이 그림에서 자유의 여신을 본보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7월 혁명에 감동받은 들라크루아가 그린 작품.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폭력과 저항, 개인의 주관과 감정을 자유분방하게 표현 하였다.

샤를 10세의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군, 농민, 그리고 어린 학생들의 모습에서 희망의 모습이 보이는 한편,

쓰러진 시체들의 야만적인 모습도 함께 어우러져 있다.

 

현지 가이드는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보며 "저작권에 걸리는 걸 찍으면 뭐하냐?" 고 했다.

 인파로 밀려다니는 박물관 실내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저런 그림은 저작권과 무관한 걸까?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답게 예술 학도들에 대한 지원이 많다고 한다. 미술관, 박물관 무료 입장은 물론이고 안에서의 모작도

허가를 받으면 가능하다고 한다. 뛰어난 작가들이 탄생하는 것은 정부의 뒷받침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下 - 모나리자와 그림 앞에 모여든 많은 관람객들.

 

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1503~06년 제작. 나무판 위에 유채 77×53

 

다빈치가 피렌체의 부호富豪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를 위해 그 부인을 그린 초상화.  라 조콘다((La Gioconda) 라고도 한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태리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이 부유한 상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조콘다 부인은 G. 포지의 조사를 통하여 피렌체의 안토니오 마리아 디 놀드 게라르디니의 딸임이 판명 되었다.

따라서 본명은 리사 게라르디니( Lisa Gherardini) 이다.


이 작품은 부인의 나이 24~27세 때의 초상이며,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초청을 받았을 때

이 미완성의 초상화를 가지고 갔었는데, 왕에게 4,000에큐에 팔려 퐁텐블로성()에 수장되었다. 때때로 세정()도 하고,

광택용 니스를 바르기도 한 관계로 전체에 균열이 생겨 제작 당시의 시원스럽고 여유있는 필치는 볼 수 없다.

이 초상은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서는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여성들 사이에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는 설, 미완성작이라는 설, 원래 눈썹이 그려졌으나

복원 과정에서 지워졌다는 설 등이 있다. 또 2009년에는 프랑스의 미술전문가가 240메가픽셀의 특수카메라를 사용하여 분석한 결과,

다 빈치는 이 그림을 3차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유약으로 여러 겹을 특수처리하였고, 가장 바깥에 그려졌던 눈썹이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화학반응을 일으켜 사라지거나 떨어져나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다 빈치는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하여 
악사와 광대를 불러 부인의 심기()를 항상 즐겁고 싱그럽게 함으로써

정숙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편안한 손 등 신기()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기()작가 바사리에 따르면, 이 그림은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고 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숙기인 제2피렌체시대에 해당하는 1503∼1506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보는 사람에게 신비성을 느끼게 하여 많은 풍설()과 함께 ‘모나리자의 수수께끼’로서

오늘날도 적지 않은 문학적 관심거리이다. 요컨대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간에 대한 오묘한 감정과 관능의 표현인 것이다.

이 그림의 역사적 경로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아 모나리자에 대한 신비성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일찍이 《모나리자》가 대낮에 루브르미술관에서 도난당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도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범인이 피렌체의 미술상 A.골리에게 팔러 나갔을 때, 골리의 기지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이 그림만큼 친근감을 주면서 많은 문제를 제시하는 작품도 드물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프랑스 대표적 고전주의 화가 다비드(1748~1825) 작품.  유채, 610×931cm.  제작년도 1807년.

 

다비드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미술관계의 제도개혁에 관여하며 황제의 제1화가가 되었다.

 나폴레옹을 만난 다비드는 열렬한 나폴레옹 추종자가 되었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등 황제를 찬미하는

 대작을 여러 점 남겼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사람들의 심리적 반응을 강조하여 나타냄으로써

역사의 극적인 순간을 재현시켰다. 역사적 소재를 다루는 다비드의 회화관을 엿볼 수 있다.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에 있었는데 다비드는 그 해 작품의 제작을 의뢰받아
다음해 12월이 되어서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대관한 후에 황후가 될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 주는 광경으로 교황 피우스 7세가 대관을 축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나폴레옹의 권력이 스스로의 힘에 의한 것이지 타인으로부터 수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폴레옹과 관계된 모든 인물이 등장하며 제각기 개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내용을 독자적으로 강조하고 각 인물의 성격과 심리적 반응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810년에 전시되었으며 다비드는 이 작품으로 나폴레옹의 10년상을 받기도 했다.

 

모여있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심지어 어린아이의 시선조차 한 곳으로 집중되어 있음은 그만큼 중요한 행사를 나타냄 이란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것을 둘러 보려니 대충 대충. 천천히 보려면 일주일은 보아야 한다나?

 

(승리의 여신) 니케 상,

사모트라케 섬에서 발견된 100 여개의 조각들을 복원한 것이다.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가 여기서 유래 되었다.

그리스 배의 뱃머리에 조각된 작품인데 막 착지하며 내려 앉는 모습이라고 한다.

말로의 '비너스'와 함께 르부르 박물관의 대표적인 헬레니즘 조각이라고 한다.

 

열심히 설명하며 유명한 조각 비너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는 현지 가이다.

 

 비너스(프랑스어- Vénus de Milo)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의 비너스)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203cm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 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며칠 후 프랑스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위빌이 이 조각상의 중요성을 인식,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마르키 드 리비에르를 설득해

조각상을 구입했다. 이 조각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었으며,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Vemus de Mlo) 밀로스섬의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 그리스 말기의 비너스상.

높이 204cm, 멜로스의 아프로디테(Aphrodite of Melos)라고도 한다.  밀로는 작가이름이 아닌 섬 이름을 말함이다.

 

발견 당시 이 여신상은 고전기()의 거장 브락시테레스의 원작이라고 하였으나,

그 후 연구 결과 현재는 BC 2세기에서 BC 1세기 초에 제작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품위 있는 머리부분이라든지 가슴에서 허리에 걸친 우아한 몸매의 표현에는 BC 4세기적인 조화를 보이기도 하지만,

두발()의 조각과 하반신을 덮는 옷의 표현은 분명히  헬레니즘의 특색을 나타내고,

그 고전적인 자태는 헬레니즘의 극단적인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고전 양식의 부활이라는 당시의 풍조에서 태어난 걸작이다.

 

허리부분을 단면으로 하여 상하() 두 개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팔이 없다.

그 없는 부분의 복원()에 대해서는 그 제작연대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자나 미술사가 사이에서 계속 많은 고찰이 있었다.

결국 오른손은 왼쪽 다리께로 내려지고 왼손은 팔을 앞으로 내밀어 제쳐진 손바닥에 사과를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21년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된 후  두문불출의 명작으로도 유명했으며, 1964년 처음으로 세계 나들이를 한 바 있다.

 

이상적인 얼굴과 신체의 비례,어긋나지 않은 곡선미를 보이는 조각으로 좌측면에서 감상하도록 조각되어 졌다고 한다.

헤라클레스.

 

 

 

프랑스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  이태리산 대리석 보다 단단하지 못해 마모되기 쉽다고 한다.

 

 

수만 여 점에 이르는 컬렉션을 모두 관람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이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역사상 유례 없는 방대한 수집량을 자랑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강탈해온 것들이 더 많지 않은가. 그것도 최고의 걸작품들만 골라서. 

 일생동안 다시 올 수 없을 기회인데 더 많은 작품을 다 둘러보지 못하고 나오려니 서운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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